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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게으르구나

어머니의 밭에서 배운 느림의 미학

by 강석효

긴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어느 날, 어머니의 뒤를 따라 집 앞 논두렁을 건너 밭으로 향하던 길.

푸성귀 모종이 심긴 밭은 푸르렀고,

그 사이사이로는 풀들이 제 세상인 듯 뻗어 있었다.

아이 눈에는 그 줄이 어찌나 길고 지루해 보이던지

숨이 꺾이고,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걸 언제 다 뽑아요?”

그 말에는 하기 싫은 마음도, 겁도, 귀찮음도 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허리를 굽힌 채,

손에서 흙을 놓지 않으시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눈이 게으르구나.”

그 한마디에 가슴이 쿡 찔렸다.

아직 손 하나 제대로 놀리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나의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말이다, 그냥 묵묵히 하다 보면

다 하게 돼 있는 거란다.”


어머니의 그 말은 마치 밭고랑을 따라 흘러가는 강물처럼

길게, 그리고 잔잔하게 내 가슴에 흘러들었다.


처음엔 흙 묻은 손이 낯설었다.

뿌리가 깊숙이 박힌 잡초를 힘주어 뽑다 보면 손바닥이 얼얼하고,

그루터기를 놓치면 금세 다시 돋아나는 얄미운 풀들.

아이였던 나는 그 모든 게 귀찮고 못마땅했다.


하지만 해가 기울 무렵,

우리가 함께 앉았던 고랑 한 줄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걸 보고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묘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땀은 흐르고 다리는 저렸지만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

그 뿌듯함이 낯설지 않고 따뜻했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말없이 부지런하되, 조급함이 없으셨고

하루를 채우는 데만 열중하지 않으셨다.

땅과 함께 사는 삶은

성급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셨다.

열매를 얻으려면 묵묵히 기다려주어야 하는 법이란다.”

그 말의 깊이를,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밭고랑 같은 일을 만나게 된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일,

눈앞이 아득하고, 마음은 자꾸 뒷걸음질 치는 그런 순간.


그럴 때마다 문득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눈이 게으르구나.”

손보다, 마음보다, 눈이 먼저 지쳐버리는 것이다.

게으른 눈은 처음부터 불가능만 본다.

끝없이 펼쳐진 고랑만 보며

처음부터 포기해 버린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지금 눈앞의 한 줌,

그것만 보라고 하셨다.

지금 한 줌만 뽑고, 그다음 한 줌.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제고 밭 하나는 다 일구게 돼 있다고.


세상은 점점 ‘빨리’를 재촉한다.

결과를 눈에 보여주라 하고,

과정의 느림에는 쉽게 등을 돌린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게

느림을 견디는 힘이

삶을 살아내는 힘이라고 가르쳐주셨다.

밭고랑도, 일도, 사람과의 관계도,

하루아침에 반짝 피는 것이 아니라고.


그 말이, 살아갈수록

얼마나 귀한 진리였는지를 알게 된다.


가끔은 나도

그때 어머니처럼 누군가의 옆에 앉아

“괜찮다. 지금 한 줌만 뽑으면 돼.”

그렇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풀을 뽑는 일도,

사람을 기다리는 일도,

내 마음을 돌보는 일도 결국은 같은 법이니까.


눈을 게으르지 않게 하고,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오늘 한 고랑을 정성껏 일구는 것.

그게 하루를 사는 태도이고,

삶을 소중히 여기는 방식일 것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밭고랑은 무엇일까.

풀만 무성한 관계인가,

미뤄둔 기도인가,

무심히 놓아둔 꿈인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고랑 앞에 무릎을 꿇을 용기,

그리고 한 줌씩이라도 시작하려는 마음이다.


삶은, 어쩌면 끝없이 이어지는 밭고랑 같다.

그 안엔 풀도 자라고, 꽃도 피고,

때로는 가시도 숨어 있지만,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보며 살아간다면

그 길 끝에는 반드시,

조용히 피어나는 작은 꽃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그 꽃은 희망이며,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밭에 가장 먼저 심으신

믿음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나도 그때 어머니처럼

눈을 부지런히 하고

손끝에 마음을 실어

하루하루를 일군다.

그렇게 살아낸 날들이

마침내 한 줄기 빛이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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