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가 꼴찌로 끝났다.
끝을 알리는 휘슬이 세 번 울렸다.
삐-익, 삐-익, 삑---.
꼴찌가 꼴찌로 끝났다. 기적을 바라던 애달픈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 참 이상하다. 돌이켜보면 꾸준한 꼴등이었는데. 10개월 가까이 되는 날들 가운데 마지막 등수가 아니던 때를 꼽는 게 더 빠를 텐데 말이다. '이것이 날 참 바보로 만들었구나.'를 강등이라는 확인 사살을 받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경기장에 있던 모두가 몇 분간 정적이었다. 움직이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충격에 휩싸였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몇몇은 울기 시작했다. 18년 차 축덕 인생의 가장 큰 충격이었다. 우리 팀의 강등이 사실이 되는 날이 오다니. 호기롭게 시작한 <뭐 하려고 이런 걸 좋아해서>의 아픈 에피소드를 만들어주고자 했는지, 덕분에 몇 장의 이야기를 끄적일 수 있게 됐다.
허무한 심정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다른 팀 팬인 친구가 말했다. 2부에서 1년을 보내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실연당한 기분이다라고 답하니.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오랜 연인이 1년 동안 해외 출장 간 거라 생각하자!"
하하. 출장이 더 길어지면 어떡하죠? 영영 안 돌아와서 완전 차인 거면 어떡하죠? 시즌 내내 지다가 고작 두 번 연속 이긴 것인데, 그 승리의 기운이 마지막 경기도 이어져서 살아날 줄 알았다. 단단히 믿었다. 현생은 몰라도 스포츠에선 기적이 일어나니까.
(2023 K리그, 11위와 12위의 승점은 같았고 골득점 수 차이로 다이렉트 강등이 확정되었다.)
말 그대로 헤픈 엔딩. 이 노래가 떠올랐다.
이번은 다르다고 매번 날 속여봐도 어김없이 언제나 그랬듯이 끝나겠지.
- 에픽하이, 헤픈엔딩
허망하게 하늘을 바라봤다. 꼴찌가 꼴찌로 끝났는데 왜 아닐 거라 믿었지. 이번은 다르다고 왜 날 속였지. 아니, 왜 모두 속았지? 바보였다. 바보.
상상을 좋아하는 난, 희망적인 미래를 참 많이도 꿈꿨다. 커리어 욕심과 야망 사이에서 늘 그 시점에서 꿀 수 있는 달콤한 꿈을 꿨다. 대학교를 가기 전에는 갑자기 좋은 대학교에 들어간 모습. 졸업 직후 가고 싶던 회사에 최종 면접까지 보고선 '왠지 나 붙은 것만 같아!'라며 다니던 회사에 어떻게 말할지 미리 시뮬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잠깐의 긍정적 시그널에 '드디어 성공하나?'라며 혼자 설레발치고 감격의 눈물을 몰래 흘리기도 했다.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나선 현실과 아예 먼 미래 속 부푼 꿈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충격을 살짝 걷어내고 강등을 받아들이니 현실이 보였다. 애초에 말이 안 되지. 같은 환경, 같은 노력을 하면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면 될 리가 있나? 벼락도 피해 갈 행운이 인생 일대에 딱 한 번 온다면 몰라도. 온 우주의 기운이 딱 우리에게 모여온다면 몰라도. 애초에 이런 가정을 하는 자세가 문제였다.
기적을 바라는 허망된 꿈은 안 되는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는 건 진짜 실력과 헌신의 노력에서 온다.
팬들은 눈물 나도록 감동적인 메시지를 보냈고 선수들은 모두가 하나 되는 기분인 듯 했다. 그래서 실력이 있었나? 승리할 수 있는 진짜 실력이 있었느냐 말이다. 현생은 잠시 못 본 체 하며 "우리 모두 간절히 바라면 이뤄집니다."라고 희망찬 내일을 그저 상상했던 것이다.
흐린 눈을 하며 대충 잊으며 살려고 한 건 내 인생도 마찬가지다. 기적이 오길 바라며 희망찬 상상만 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100%를 채우기 위해 120%, 150%를 하지 않고 천천히 느긋하게. "요즘 뭐 해?"라고 물으면 그럴듯하게 "해외 대학원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라고 답했다.
100%를 채우지도 않으면서, 진짜 실력과 미래를 바꾸기 위한 헌신의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들의 강등이 날 둘러싼 나태함을 깨우치게 하고, 풀어진 긴장감에 자극을 줬다.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 넘버 <A new life>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일어나 툭툭 털고 꿈에서 깨어나
공연한 환상에서 벗어나
꼴찌가 꼴찌로 끝났다. 헤픈 엔딩이었다. 이젠 꿈에서 깨어나고 환상 속에서 벗어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