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에 진심인 그들
때가 되니 사람 한 명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큰 가방 지퍼를 연다. 비장해 보이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고정된다. 가방 속엔 큰 천과 여러 부품들이 있고 이를 주섬주섬 조립하더니.
짜잔! 파라솔 등장!
'진짜? 파라솔이라고? 파라솔을 든다고?'
눈을 의심했다. 파라솔을 펼칠 때 잠시 맞을 뻔했지만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매우 흥미롭게 지켜봤다. 이젠 우산으로는 모자라 파라솔을 드는구나라는 생각과 무엇이 그들을 파라솔까지 들게 했을까 궁금했다.
가끔 무리 지어 응원하는 사람들 중엔 욕설을 퍼붓는 강성도 있는데 이들은 달랐다. 누구보다 신속하게 파라솔을 촥 들고, 열심히 돌리고! 퍼포먼스 타임 종료와 함께 빠르게 해체! 다시 가방에 넣어! 응원만 열심히 하는 진정한 퍼포먼스 마스터!
몇 해 전 친구가 말했다. "나 청백적 우산 사고 싶어.' 난 답했다. "정말? 그 우산, 너무 파라솔 같아서 현실세계에서 쓸 수 있겠어? 하하."
(*청백적 우산: 파랑, 흰색, 빨강. 이 세 개의 색은 팀 시그니처 컬러로 이를 활용해 만든 우산을 뜻한다.)
수원은 응원 문화로 유명하다. 축구는 못해도 응원은 잘한다는 자부심으로 수원을 좋아하는 팬들도 많다. 나 또한 떠나려 할 때마다 붙잡는 축구장 노래방 문화에 빠졌다. 매번 가서 응원가를 부르니 실제로 성량도 늘고 노래 실력도 늘어난 것만 같은 기분. (어디에도 써먹지 못할..)
때론 축구를 보러 가는 게 아닌 노래 부르러 간다는 사람도 있고, 새로 수원에 온 사람들에게 또는 상대팀에게 퍼포먼스를 보여주러 간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 많은 응원가와 퍼포먼스 중 한번 보면 입을 벌리며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게 하는 것이 바로 "우산 퍼포먼스"다. 청백적 우산을 위로 펼쳐서 수많은 팬들이 노래를 부르며 돌리는 것이다.
한 달에도 몇 번 보는 장면이지만 항상 쇼 타임이 시작되면 한 컷이라도 꼭 남겼다. 가끔 수원 문외한인 친구들을 초대했다. 하프타임이 끝나면 시작되는 쇼 시간에 맞춰 "지금이야, 지금! 저거 봐봐! 멋지지?"를 외치며 친구들에게 우산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신기한 일이 생기고 있다. 어쩌다 보니 수원 사람이 아닌 지인들이 수원삼성 팬을 새 가족으로 맞이하는 일들이 늘고 있다. 한 친구는 남편이 혼자 수원을 응원하던 사람이었다. 친구에게 수원팬이니 의리 있는 사람이랑 결혼 잘하는 거라며 축하한다 했다. 친구는 어이없는 이유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전엔 대학교 동기가 이제 결혼을 준비한다면서 시댁 가족분들이 아주 오랫동안 수원삼성을 응원한 찐팬이라고 했다. 그 친구는 우산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상견례 날 비가 내렸는데 시어머니 손에 들린 청백적 우산을 봤다고 해 단번에 "찐이시구나!"라며 인정했다.
인스타그램으로만 소식을 듣던 학교 선배는 강등 위기를 겪던 시기부터 스토리에 부쩍 수원 이야기가 늘었다. 팀이 어려워서 더 빠져버린 나처럼 말이다. 학교 CC였던 언니는 이제 남편과 함께 강원도에서 수원을, 또 다른 지방 경기를 다니고 있었다.
친구와 경기를 보러 가서 언니 부부를 오랜만에 만났다. 재밌게 수다를 떨다 언니 손에는 파라솔 또는 장우산이 아닌 귀여운 미니 우산이 있었다. 횟집에서 나오는 이쑤시개 우산보다는 큰, 젓가락으로 만든 정도의 사이즈. 직접 만들었다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
나중에 선물해 준다고 하니 그 정도 사이즈는 실컷 돌릴 수 있으니까 열심히 돌려봐야지!
유난스러워 보일 거다. 왜 파라솔까지?라고 나마저 물었지만 우리의 퍼포먼스를 빛낼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그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된다.
수원 팬인 걸 숨기고 싶어 하면서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막 감추려 해도 들통나는 그들의 모습이, 또 내 모습이 웃기고 재미있다.
강등된 지 6개월이 지났다. 축구는 이기는 걸 보려고 응원한다? 아니다. “이젠 지는 것쯤이야!”의 희한한 자세로, 산전수전의 시간으로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삶의 일부가 된 이 문화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