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예 Nov 27. 2023

성장을 멈춘 유망주

그래도 열심히 뛰잖아

쟤는 참 아쉬워. 보여줄 듯 말 듯.


연령 별 국가대표에 꾸준히 차출되던 유망주에서 지금은 우리 팀 팬들만 아는 선수가 된 누군가를 보며 친구와 얘기했다. 매 경기 출전하며 골을 펑펑 터트리는 에이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잊을만하면 보여줬다.


골문 앞까지 가는 플레이가 좋다거나 어쩌다 한번 속이 뻥 뚫리게 해주는 슈팅을 보여준다거나. 무려 그걸 데뷔 때부터 봤으니 팬들은 그의 성장을 무척 기대했다.


"그러니까. 더 클 수 있었는데 저기서 멈춘 느낌이야."

찬 바람이 그 순간 얼굴을 스쳤는데 찰싹 내 뺨을 치듯 번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도 유망주였을까?


스포츠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농구계에 잠시 발을 담근 적이 있다. 한 선배가 신입인 내게 말했다.


"A 부장님이 너 잘 키워볼 거래." 


미생에 나올 것만 같은 대사를 들으니 잠시 설렜다. '이곳에서 잘해서 축구로 가야지!'라는 흑심을 품고 열심히 던 내게 기대를 품은 누군가가, 어딘가에 있었다.


하지만 상상과 달랐던 그 세계의 혹독함은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게 했다. 뭐라도 되어 보겠다는 야망은 사라졌고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일한 기간 보다 더 오래 쉬어버렸다. 이상한 환경에 상처받았다는 슬픔으로 시작해 우울에 자아도취 했다. 늪에서 허덕이며 시간을 보내다 겨우 세상으로 다시 나왔다.



사실은 실력이 거기까지였던 거지.


터질 듯 말 듯 그러다 멈춘 유망주는 10년 전에도 있었다. 남다른 피지컬에 이따금씩 터트리는 골. 그리고 어린 나이. 사람들은 기대했다. "얼마나 대단한 선수가 될까?" 감독들도 기대했고 꾸준히 출전했다. 갈수록 높아지는 기대치에 선수는 도달하지 못했고 늘 애매했다.


이 선수는 왜 안 터질까라는 토론이 열렸다. 그 댓글창에 누군가가 남긴 말을 보고 대신 상처받았다. "사실은 실력이 거기까지였던 거지."


그는 역사에 남을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우리 팀에 필요한 좋은 선수였다. 본인을 두고 펼치는 사람들의 대화들이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그런 얘기가 더 자랄 수 있는 선수를 멈추게 했거나 혹은 충분히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중임에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신입일 땐 누구나 그렇듯 패기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진 못해도 속으론 건방지게 '나 일 잘하는 것 같아.'라며 착각 아닌 착각을 했다. 겸손한 척하면서 몰래 선배들을 오롯이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를 키워보겠다는 상사의 말도 들었으니 건방이 더 올라갔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고 또 프로덕트 오너로 일하면서 한계에 갇힌 듯한 모습에 깨달았다.


'나 하나도 안 똑똑하네.'

일은 할수록 잘하고 있는 게 맞나라는 고민들의 연속이었다. 후배들이 늘어날 땐 괜찮은 선배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수가 받은 팩트폭행이 내게 돌아왔다. 현실은 신입이라는, 유망주라는 프레임에서 괜찮았던 것이지. 정말 일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다는 걸. 사실은 실력이 거기까지였던 것일 수 있다는 것.



그래도 열심히 뛰잖아.


처음 말한 그 선수에게 붙는 또 다른 문장이다. 저 선수는 뭔가 아쉽다는 말 뒤에 그래도 열심히 뛰잖아라는 말. 테크닉은 더 자라는 것 같지 않아도 패기 넘치는 신입 시절이 지나 곧 고참이 되어가도 그 선수는 여전히 팀을 위해 열심히 뛰는 선수다.


부상자가 늘고 진심으로 팀을 위해 뛰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 때 머릿속엔 그라운드에 없던 그 선수를 찾고 있었다. 그 선수는 열심히 뛸 텐데, 뭐라도 해보려고 할 텐데라며 말이다.


성장을 멈춘 유망주라는 생각으로 나의 상황에 대입했던 게 미안해지던 순간이었다. 모두의 기대를 받던 신인에서 후배들이 늘어난 지금, 여전히 같은 곳에서 몇 년 간 꾸준히 뛰고 있다는 것. 또 어려운 상황에 떠올리는 선수가 되었다는 것. 그것 또한 존경받을 재능이고 능력이다.


어떤 선수는 31세에 처음으로 성인 국가대표가 되었다. 남들에게 잊힌 유망주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노력하던 그 선수는 은퇴를 앞둘 시기에 국가대표가 된 것이다.



멈춘다면 멈춰지지 않고 가라 앉는다.


기대치가 부담스럽다고 성장이 안 느껴져서 괴롭다고 멈춰 있으면 멈춘 그 상태가 아닌 그 아래로 하향한다. 환경이 어떻든 간에 가야 할 길이 있다면 멈추면 안 된다. 환경을 탓하며 꽤 오랫동안 멈추고 아주 느리게 걷던 내게 하는 말이다.


한때 유망주였던 건 중요하지 않지. 매일 훈련에 나서고 주변에서 흔들어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선수들처럼 과연 노력했는가. 그래도 열심히 뛰잖아라는 말을 들을 만한 노력을 했는가?


축구로 향하는 길을 다시 보는 지금, 성공을 방해하는 적 그리고 내 꿈의 유일한 방해물은 게으른 나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이전 03화 덕후의 탄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