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지
정녕 축구 보러 가는 길인가. 설레지도 않고 긴장만 되는 두려운 출근길이다. '축구 보는 날!'로 정하면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가서는 무엇을 먹을지, 선수들은 누가 출전을 할지 등. 설레는 생각들로 가득했지만 오늘은 다르다.
"뭐 하려고 이런 걸 좋아해서 내 돈 내고 고생이니."라는 대사를 내뿜게 만든 후 맞이하는 첫 경기. 다이렉트 강등 확정까지 두 경기만 남은 상황. 이 경기마저 패배한다면 작은 실낱 같은 희망도 사라진다.
*다이렉트 강등: K리그 1부 리그의 승점 꼴찌 12위는 2부 리그로 바로 강등되는 것을 의미.
그럼에도 가야지, 치열한 티켓팅을..! 실패해... 원정석에도 앉지 못하고 일반석에 얌전히 앉아 경기를 봐야 한다. 시력이 안 좋아도 흐린 세상이 좋아 안경을 잘 쓰지 않는다만 축구를 볼 때는 다르다. 마치 경기 전 몸을 푸는 선수들처럼, 난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안경닦이로 이곳저곳 닦으며 경기에 임할 준비를 마친다.
경기 시작!
평양냉면처럼 슴슴한 패스들이 이어지다 잠시 한 눈 판 사이 삑! 휘슬이 불린다. 심판 손이 주머니를 향하더니 갑자기 저 멀리 빨간색이 보인다. 어? 아니야... 이럴 순 없어... 레드카드???!
전반 15분
고작 전반의 1/3, 경기 전체의 1/6이 지난 시점에. 11명으로도 상대팀을 마주하기 힘든 우리 팀인데... 고작 10명으로 경기를 뛰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혹시나 하는 조그마한 점만 한 기대마저 바사삭 부서졌구나. 그러다 몇 분이 지나 바로 먹힌 골. 상대팀 분위기는 승승장구다.
이럴 줄 알았어. 기대도 안 했어. 친구에게 경기장에 남아 있을 마지노선 스코어를 통보한다. 3대0. "3대0으로 지는 순간이 오면 난 여기 떠날 거야." 응원하는 팀이 질 거란 악담을 하는 충성심 부재와 3골은 먹히고 나서야 떠나겠다는 마지막 미련 그 사이다.
못 떠나지! 골을 넣었다. 뒤로 고꾸라지면서도 발을 뻗은 그 선수 덕에 골이 들어갔다. 10명이지만 11명처럼 뛰는 선수들 덕에 골을 넣을 수 있었다. "이게 축구지!"라며 말한다. '3대0 예시'를 말하던 때와는 생판 다른 모습으로 맘껏 설레기 시작한다.
후반전 시작
한번 더 먹혔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왔다 갔다의 진수를 보이며 축구를 본다. 그러다 우리가 넣었다! 10명 대 11명의 대결이 맞는 거야? 비등비등하게 경기를 치르고 있다.
경기는 2대2.
이러니까 축구지. 기대를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잖아. 긴장되고 두렵기만 했던 출근길이 미안하게, 한 명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결과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때론 기대한 것만큼, 때론 기대한 것보다 못하기도, 그러다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버리는 과정을 만드는 이것을 놓을 수가 없다. 내게 도파민 중독은 축구인가.
경기 종료 직전
다시 한번 골을 넣었다. 경기 종료 직전 골만 먹히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3대2 승리. 이 상대팀과의 원정 경기를 이겨보지 못한 것이 몇 년 째인데.
기대를 종이처럼 꾸깃꾸깃 접어서 땅바닥에 패대기칠 때도 있고. 얇은 종이 한 장의 기대를 그날의 그 경기가 여러 종이를 덧붙여 두꺼운 책 한 권을 뚝딱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렇게 책들을 집으로 가져온다. 그 한 권들이 방 한편에 쌓이고 함께 살아간다.
몇 번을 지고 끊임없는 실망을 시켜도 저번 달에 가져온 책 하나, 몇 년 전 가져온 책 하나를 아주 가끔 펼칠 때 주는 감동이 다시 발길을 경기장으로 향하게 한다.
집에 함께 온 오늘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꼴찌 팀이 10명의 선수를 데리고 3대 2로 승리했다.>
여전히 꼴찌다. 그럼에도 이런 날의 결말이 내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