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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예 Sep 09. 2024

감독의 수난시대, 그 끝은

오버래핑의 창시자와 함께

오버래핑, 측면 수비수가 공격 가담을 위해 빠르게 달려 침투하는 행위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축구를 처음 했을 때의 일이다. 축구가 너무 좋아 우당탕탕 초보 여자 축구팀을 만들었다. 지인으로 구성된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윙백, 풀백이 멋있어. 오버래핑 할거야. 치고 달려서 공격 포인트를 내고 싶어!" 어림도 없지. 공격 잘하는 수비수가 되기 위해선 날쌘돌이처럼 빠르게 달려야 한다. 달리기로 한 번도 순위에 들어본 적도 없이 꿔본 상상이었다.


축구를 볼 때마다 느꼈다. 오버래핑. 저거 참 멋있다. 헛다리, 킬패스, 기타 등등. 어쩌다 알게 된 축구 용어가 아닌 직접 검색해서 찾아본 첫 기술이다. 그리고 알게 됐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감독이라 꼽은 사람이 <우리나라 오버래핑 창시자>라는 말을 들었다는 걸.




선수 시절엔 풀백*이었다. U-17 청소년 대표팀 감독이 되었고 월드컵에 나가 조별리그 탈락을 했다. 큰 실패를 맛봤다. 축구학과 교수를 하다 K리그 꼴찌팀을 맡았고 한 시즌 만에 준우승을 시키는 기적을 만들었다. 이것이 2010년 제주유나이티드 소속이었던 박경훈 감독님에 대한 이야기다.

(*윙백, 풀백 모두 뛰었겠지만 편의를 위해 풀백이라 칭함.)


공부에만 빠져서 살아야만 했던 시절 간간히 찾아본 K리그 소식 중 가장 눈에 띄는 뉴스였다. 그 감독은 패션 잡지를 즐겨보며 멋진 스타일링으로 그라운드에 섰다. 승리 시 머리를 팀 컬러인 오렌지로 염색하겠다 하고 그 팀의 축구 철학에 이름을 붙여 홍보를 했고 결과를 만들었다. 브랜딩을 아는 감독이었다. 우리 팀 팬들이 알면 대노.. 할 만한 이야기지만 그 팀의 감독이 보이는 행보가 마음에 들어 잠시 2순위로 그 팀을 좋아했다.


수능이 끝나고 처음 해본 알바 또한 그 감독의 경기를 볼 수 있을까 하고 신청한 'K리그 챔피언 결정전' 진행요원이었다. 그날 난 엘리베이터 지기였다. 앞에 서서 관계자들이 가까이 오면 버튼을 눌러주는 희한한 업무였다. 운이 좋게 제주 팀 관계자들이 타는 곳에 서서 하루동안 일을 했고 아는 얼굴이 지나가면 속으로 흠칫 놀라 좋아했다. 그리고 밖에서 들리는 서울 팬들의 환호 소리에 제주가 준우승한 것을 알게 됐다. 성인이 되어선 난생처음 혼자 축구 관람을 하러 제주월드컵경기장에 가보기도 했다.  


어느 날 인사를 드렸다. "제가 감독 시절에 팬이 되어서 제주 경기장도 가고... 어쩌고저쩌고 했습니다. 우리 팀에 와주셔서 감사해요. 응원합니다."라며 덕후의 면모를 보였고 반갑게 악수를 해주셨다. 왜냐, 우리 팀 단장으로 오셨기 때문에. 덕후는 우연이 만든 인연에 감탄한다. 오버래핑부터 돌고 돌아 우리 팀 단장님이라니. 잘하실 거야. 믿었고 이 분을 모셔왔다.




선수 시절엔 풀백이었다. U-17 청소년 대표팀 감독이 되었고 월드컵에 나가 조별리그 탈락을 했다. 무려 3패를 하며 큰 실패를 맛봤다. 축구협회 전임 강사를 하다 1부에서 강등된 팀의 감독이 되었다. 이 감독도 한 시즌 만에 (...)?


아무도 모를 일이다. 허나 <감독의 수난시대>를 수년간 겪은 팬의 마음은 이렇다. 이런 감독이라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와 실컷 실패도 해보고 배우면서 같이 성장하면 어떨까. '퍼기의 아이들'의 한국판이자 그 시절 반짝했던 '김호의 아이들'처럼. 이를 잇는 '변성환의 아이들'과 함께. 언젠가 저-기 위 그곳으로, 그러다 눈 내리던 그 겨울로.


한 시즌만의 기적? 그런 거 필요 없다. 영향력 없는 한 팬의 마음은 이렇다. 적어도 2년은 조용히 응원만 할 거야. 우승, 6위, 10위, 강등. 차근차근 내려오다 수직 낙하했다. 이 과정 속 오고 간 감독들이 5명이다. 가장 좋아하던 세리머니의 주인공, 고생한다며 반갑게 인사해 준 그 코치, 모두의 유니폼 마킹 0순위. 추억 속 사람들이 한순간에 욕받이가 되어 떠났다. 상처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들이 많았다. 이제 믿고 따라볼까 하면 몇 개월도 안되어서 경질. 이 사람은 정말 아닌데, 아닐 거야 했더니 감독 선임. 뒷목을 잡게 하는 일들이 수두룩했다.




어느 날 좋아했던 그 감독이 새 단장으로 왔다. 들어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새 이름을 데려왔다. 심지어 프로팀 정식 감독은 처음이다. 그런데 다르다. 다른데? 왜지. 왜 다르게 들릴까. 사람들은 감독의 무덤이라 불리던 이곳에서 수장이 된 소감을 물었다. 1%의 기적이 본인에게 일어났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팬덤이 뒤에 있다는 것, 그건 다른 감독에겐 없는 본인에게만 갖고 있는 특별한 것이라며 팬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


인터뷰, 기자회견에서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내공이 느껴진다. 말을 정말 잘하신다. 그 말은 단순히 타고난 화술 덕이 아니다. 수많은 공부와 경험, 넘치는 인풋들이 본인 안에 그득그득 담겨 철학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진심이 느껴진다. 진정성이 보인다. 철학은 전술이 되고 팀이 된다. 그 사람만의 특별함이 우리 팀에 점점 녹아든다. 드디어 축구의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축구유튜버 김진짜 채널에 한국과 유럽 코치 문화에 대해 비교한 김주표 코치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공부하고 적용하면서 기준을 가지고 계획해 나온 실패라면, 그건 좋은 실패라는 것. 그렇기에 기다려 줘야 한다고. 무엇을? 그 실패를 실패자가 잘 이용할 수 있게. 결국, 그 실패가 성공으로 갈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그 예시로 우리 팀 감독님의 U-17 대표팀 경험을 들었다.


변 감독은 꾸준히 말했다. 감독으로서 본인은 실패다. 하지만 선수들은 실패가 아니다. 17세 이하 선수들에겐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이 선수들이 프로에 가서 전술을 이해하고 부족한 걸 채워서 성장할 수 있도록, 그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몇 년 후엔 너희들 덕에 감독인 내가 회자가 될 것이라며 예언을 했다.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벌어졌다. 성인도 되지 않은 선수들이 프로 무대를 휩쓸고 다니자 정말로 사람들이 감독님을 찾기 시작했다.




프로덕트 오너로 일한 나는 여러 기업에서 이렇게 묻는 것을 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실패한 경험에 대해 말해주세요." 프로덕트 매니지먼트가 대두되고 성공한 해외 스타트업들이 성공 경험만큼이나 실패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면서 여러 한국 기업들이 차용하기 시작했다. 아니, 왜 자꾸 실패 경험을 말하래. 성공 경험 말하는 것도 어려운데! 뭘 모르고 이렇게 속으로 떠들었다.


배웠다. 이런 사람에게 실패할 기회'도' 줘야 한다는 걸.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날을 공부하고 경험해 인풋을 가득 채운 사람. 그 인풋들을 스스로 정의 내려 자신만의 철학으로 만든 사람. 그 철학이 곧 도전이 되어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사람. 그런 멘탈리티를 가진 사람이 자신이 소속된 팀을, 프로덕트를, 기업을 바꾼다는 것을 말이야. 아, 이런 사람이 결국 성공을 만드는구나.




다른 동네에서 들리는 소식이 낯설지 않다. 감독의 수난시대, 그 끝은 어딜까. 언제 끝이 날까. 우리는 추락한 경험이 있다. 꼭 '그 일'을 직접 경험해 봐야지만, 충격을 받고 고치고 바꾸고 달라지려 한다는 건 축구뿐만이 아니다. 어디서나 많이 본 일이다. 그럼에도 우린 정말로 겪어봤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제야 다행히 바꾸기 시작했다. 욕심과 사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보인다. 아직 그 동네는 더 큰 충격이 와야 겨우 바뀔 듯해 보인다.


실패할 기회, 주어졌다. 이 팀에 몸을 담아본 사람이 아니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한 사람도 아니다. 실패를 결국 성공으로 바꿀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졌다. 수많은 인풋, 자신만의 철학, 끝없는 도전을 가진 사람이라 믿기에 주어졌다. 우리는 이젠 안다. 학연, 지연보다 더한 리얼 블루도, 축구계 유명인사라는 것도 중요치 않다는 걸.


내 인생보다 더 걱정되었던 우리 팀에, 변화의 시작이 될 귀한 사람이 왔다. 이제는 기다려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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