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할 겨를이 없이 주섬주섬 침대를 내려가 업무를 시작한다.
병동 채혈이 끝나고 급한 동맥혈 채혈까지하고 나면 시간은 대략 8시 30분.
그 시간동안은 머리를 비우고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손을 바삐 움직인다.
주사기를 꽂고, 피를 뽑고, 물을 넣고, 다시 주사기를 꽂고. . .
새벽마다 단잠에서 깨어나 냅다 채혈을 당하는 건 또 얼마나 힘든 일일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주사를 꽂고 있자면 선뜻 말을 걸기도 어렵다.
그렇게 말 없이 묵묵히 저 채혈 꽂다발들을 혈액으로 채우고
어둑어둑하던 창 바깥이 햇빛으로 물들때면
아 이제 채혈이 끝나가는구나- 싶다.
이제 슬슬 머리가 깨어나고 생각이 돌아간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거지?
오늘 오후도, 내일 새벽도 어차피 똑같은 일을 계속 할텐데.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대체 여기서 내가 왜.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일단 꾸역꾸역 장부에 써진 일을 하나씩 해치운다.
정말 도저히 더 이상 못할 것 같을 때에는 당을 때려부으면 조금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이 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럴 때는 액상당을 들이붓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래서 그러니까.
도망가고 싶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지만 나는 도망간 인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벌써 포기하지? 조금만 더 버티면 될텐데. 남은 인턴들 생각은 안하나?
라는 생각이 누르면 튀어나오는 탱탱볼처럼 마음 속 깊이 불쑥불쑥 숨어있었다.
그들은 단지 조금 일찍, 조금 세게 일태기가 왔을 뿐이다. 다른 것은 성격 따위가 아닌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지 사직서를 내기에는 이 병원에 가진 애정이 다 닳지를 않아서
어찌저찌 오늘의 근무를 끝내고 내일을 준비하러 숙소에 돌아가는 길.
권태기는 왔지만 아직 헤어질 정도는 아닌가보다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내일은 또 내일의 채혈이 있으니
쓰러지듯 침대에 허물어져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