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보는 것과 바라보는 것

두바이 일기

by 네네

두바이의 주말은 금, 토요일이다.


불금이 아닌 불목을 외치는 중동에 야심 차게 파견되 어 온 나는 코로나를 핑계로 그냥 좀 더 더운 한국에 있 는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목요일 저녁이 되면 여느 직장 인처럼 신나게 노트북 전원을 끄고, 서랍 깊숙이 집어넣 는다. 전자파는 그만 쐬고 싶지만 주말 동안 나의 웃음 을 챙겨 줄 핸드폰과 패드를 서랍 속에서 꺼낸다. 그렇 게 나의 주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일’요일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일요병이 찾아 왔다.


어느 11월 토요일, 그날도 일요일 출근을 잊기 위해 전 날 방영된 한국 예능을 보며 소소한 웃음을 짓고 있었 다. 아직 저녁 7시인데 너무 부지런히 본 탓인지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한국에서보다 더 열심히 예능을 보고 있 었다. 창문 밖을 보니 여름에는 더워서 개미도 안 보이 는 두바이인데 웬일로 거리에 사람들이 보였다.


‘벌써 겨울이 왔구나.’


40도를 넘는 두바이의 여름이 가고 20도의 겨울이 왔다. 11월부터 2월은 두바이에서 최고의 날씨다.


‘저녁거리도 사야 하고... 마트나 갔다 올까?’


집 근처 마트까지 10분 정도만 걸을 생각으로 나갔다 가 밤 10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다. 무려 2시간을 걸은 셈이다. 예능 한 편도 쉽게 질려 한자리에 앉아 꾸준히 보지 못하는 내가 이날, 나로서는 역대급인 21,983걸음 을 걸었다.


어떻게 이렇게나 많이 걸었지? 우리는 즐거운 일을 할 때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한다. 나는 두 시간 동안 동네를 구경했다. 반짝이는 주황색 전구 아래 덩치 큰 아랍 남자 8명이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며 맥주 대신 콜 라를 기울이며 수다를 떠는 모습, 그 옆에 누군가를 기 다리며 히잡 사이로 바쁘게 눈을 돌리는 여성들. 오랜만 에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과 경치가 새삼 새롭고 신기 했고, 그렇게 나는 발보다 더 빠르게 눈 운동을 하며 거 리를 누볐다.


그동안 나는 예능을 보며 (See) 즐겁게 시간을 보낸 다고 생각했는데, 바깥세상을 바라보면서 (watch) 훨 씬 더 새롭고, 기억에 남을 즐거움을 느꼈다. 예능을 보 며 일시 정지를 한 적은 한두 번 있을까? 걷는 동안, 나 는 거리의 사람들과 카페와 음식점들을 보느라 몇 번이 나 일시 정지를 했는지 모르겠다.


지난 몇 개월간, 나는 그토록 오고 싶었던 두바이에 와서 코로나와 더위를 핑계로, 중동 사람들 대신 폰 안 작은 스크린으로 겨우 떠나온 한국을 보며 시간을 보내 고 있었다. 평범한 두바이의 거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도 즐거움을 느끼고 나니, 일요일이 되면 현지 동료들을 바라보며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 게 되었고, 다음 날 두바이에 온 후 처음으로 일요병을 겪지 않았다.


수동적으로 보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것에 나의 시간을 쏟자.


두바이에서 늦었지만, 첫 번째 인생 깨달음이다.

이 첫 번째 글도 미래의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seen이 아 니라 watched 되길 바라며.

ㅡ 30도의 두바이에서




하루 24시간 중 기억에 남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오늘 먹은 점심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이미 사 라졌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안 그래도 짧은 인생, 그중 일부는 꼭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만 하는 걸까? 우리 뇌는 기억을 더 많이 한다고 해서 더 빨리 늙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투자한 그 시간과 경험이 아예 사라진다는 것은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매일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특 별한 일을 만드는 것도 한계가 있고.


몇 안 되는 일기 중, 두바이 파견 생활 중 쓴 글을 찾 았다. 지금 보면 아주 형편없지만 보는 것과 바라보는 것 이 주는 기억의 차이를 처음 느꼈던 때인 것 같다. 덕분 에 이때의 시간만큼은 다행히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 아있다. 이때부터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잠시 멈추어 생각하면서 짧 은 인생의 한순간이라도 더 기억하고자 했다.


그리고, 2년 후 내가 썼던 자음의 세계를 돌아보며 멋 쩍은 웃음을 지었다. 철학은 있었지만, 실천은 없었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책은 내쓸내실, 내가 쓰고 내가 실패한 다짐들에 대한 회고록이자 워크북이다. ‘ㄱ’부터 ‘ㅎ’까지, 국경을 넘은 일상 속 평범한 단어에서 발견한 사유의 조각들을 에세이, 회고록, 그리고 질문의 형태로 풀어내어 정답 있 는 완벽한 삶보다 변화하는 생각의 숙명을 기록하고자 했다. 생각은 많았고, 실천은 적었다. 그래도 그것조차 나였다.

ㅡ 몇 년 후, 30도의 한국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