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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네 Dec 01. 2023

행복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올레 8] 12코스 ‘행복의 목적을 생각하는 길’

역시 걷기는 최고의 현실 디톡스인가.

여행 첫날인 어제는 몸도 마음도 무거운 상태로 겨우 10시에 일어났는데, 오늘은 걷기로 그새 현실 디톡스가 되었는지 알람 없이 6시에 기상을 했다. 모슬포항에서 오랜만에 모닝 쓰리콤보 (스트레칭, 명상, 감사일기)를 하고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올레 12코스 출발지인 ‘무릉외갓집’에 도착했다. 가을이라 챙겨 온 외투가 뜨거운 제주도 태양 아래 가죽재킷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11월인데 비는커녕 23도의 날씨라니… 지난 9월에는 30도였고… 제주도 날씨 요정 홍보대사가 있다면 지원하고 싶다.


더운 날씨 탓에 시작도 하기 전에 진이 빠지려 하는데 어디선가 맑고 청량한 동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골길에 트로트가 아닌 동요가? 더 놀라운 건 스트리밍이 아니라 실제 음성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열 명 남짓의 초등학생들이 선생님 뒤로 줄을 지어 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었다.


“잠깐만요 여러분, 이게 뭔지 아는 사람?”

“저요, 저요! 들깨요!”


‘내가 아는 순댓국에 넣는 그 들깨를 말하는 건가?’


짧은 빗자루처럼 생긴 ‘들깨’를 둘러싸고 어린 친구들이 정답을 맞히기 위해 손을 들고뛰었다. ‘큰 상이라도 걸려있나?’ 그러고 보니 나도 초등학교 이맘때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모자이크 감을 만든다고 엄마랑 밤새 연필 뒤꽁무니로 색종이를 찢어 붙였던 기억이 났다. 그땐 알림장 쓰기, 방학 숙제 하나하나 열심히 했다. 단순하게 그게 나의 유일한 목표였을 테니까. 지금은 인생 자체가 복잡하다. 나는 동요소리로부터 너무 멀어지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늦췄다.


어제 걸은 올레 11코스가 죽음을 생각하는 길이라면, 12코스는 채소의 탄생 과정을 생각하는 길이었다. ^^ 희미해져 가는 동요소리를 배경으로 동화책 같은 채소밭이 펼쳐졌다. 오른쪽에는 양배추 밭, 왼쪽에는 마늘 밭, 코너를 돌면 브로콜리 밭, 그리고 하마터면 놓칠뻔한 부끄럽게 살을 내놓은 무 밭.


나도 오늘은 초등학생 때처럼 단순하게 하나만, 채소만 생각해 볼 마음으로 저녁에 비빔밥을 먹기로 하고 비벼먹을 채소명이나 상상하며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릉 ~ 용수를 가로지르는 17.5km 12코스의 절반 이상이 채소 밭이었다. 자린고비도 아니고 비빔’ 밥’이 아니라 비빔’ 밭’을 먹은 느낌이라 저녁에 고기를 꼭 먹으리라 다짐하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단순해지긴 한 셈이다…)

비빔밥이 아니라 비빔밭을 먹은 기분이다

1시간 정도 후에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원연못’에 도달했다. 연못 앞에 단순해진 나의 어린이 생각을 다시 어른이 생각으로 돌리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은 다르다”
- 영화 매트릭스 中


어제 정한 나의 묘비명이 생각났다.

‘그래. 체력이 있는 것과 체력을 쓰는 것은 다르지.’

마음이 있지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선물을 포장하고 전달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어디서 들은 기억도 났다. 어제 정한 나의 묘비명과 신기하게 딱 들어맞는 멋진 명언이었다. 오늘도 나의 몸을 쓰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며 연못을 지나 힘겨운 녹남봉 오름을 쏜살같이 올랐다.


덕분에 체력도 빠르게 소진되어 중간 스탬프 지점에서 30분 넘게 쉬고 있는데 축제 프로그램으로 가야금과 거문고 공연이 시작됐다. 순간 두 달 전 스스로 감탄하며 만들었던 행복 패스포트와 행복 월드컵이 떠올랐다. 월드컵 파이널리스트는 글쓰기, 피아노, 작곡이었다. 글쓰기는 시작했는데 피아노는 먼지 한 번 닦아줬고… 작곡은 나이 들어도 할 수 있으니까 생각하며 알아보지도 않았다. 가야금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행복을 아는 것과 행복을 실천하는 거야말로 다르잖아.ㅠㅠ‘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지다가 글쓰기는 시작했다며 위안을 삼았다. 그때 아침에 마주쳤던 들깨를 외치며 신난 초등학생들이 생각났다.


‘내 목표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닐까? 내 인생을 내가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행복하기 위해 목표를 세웠는데 행복이라는 빛 좋은 허울 안에 오히려 조바심만 생겨 내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린이를 잠시 어른이로 바꿔준 도원 연못

두 달 전 구상한 나의 행복 패스포트는 올레 패스포트처럼 목표로 이루어져 있다. 브런치글 5개 쓰기, 노래 1곡 작곡하기, 피아노 녹음 1번 하기 등등.


이중 유일하게 목표를 달성한 것은 글쓰기였는데 사실 5개의 글을 발행했을 때 상상했던 큰 행복은 없었다. 오히려 목표를 달성해 버리니 더 쓰기가 머뭇거려졌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운 좋게 그때쯤 소중한 한 분이 첫 구독을 해주셨는데 한 분에게라도 읽을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분을 생각하며 몇 개의 글을 더 썼다. 결국 글쓰기를 계속하게 된 이유는 글 몇 개 목표 달성이 아닌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늦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작곡과 피아노를 시작하지 않은 이유는 나만을 위한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행복 패스포트에는 수치화된 목표만 있을 뿐, 왜 하고 싶은지 목적이 없었다. 그래서 행복 패스포트는 그냥 투두 리스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정말 올레길은 신기하다.

이런 복잡한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곧이어 탁 트인 바다와 함께 ‘도구리’라는 소원 비는 바위가 나왔다. 바위 위에는 ‘재물운, 건강운, 연애운’ 거북이 모형들이 있었다. 나는 다 필요 없이 그냥 ‘행복운’을 빌었다.


- 평온하게 해 주세요. 특별할 때만 말고, 매일매일 마음에 평온이 깃들게 해 주세요.

- 엄마아빠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 주세요. 더 멋지게 효도하고 싶어요.

- 저를 더 사랑하게 해 주세요. 그래야 저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 없이 소원을 빌고 나니 내가 그토록 행복하고 싶은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다. 내가 행복해야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더 자주, 더 많이 챙겨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날만 말고. (그게 찐 행복이려나)


행복 월드컵을 통해 나의 행복을 알았지만 적극적으로 실행하지 않은 이유는 목적 없는 목표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라는 목표는 나만의 성취감을 위한 목표였기 때문에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지만 반대로 언젠가만 시작하면 되고,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나약한 인간의 의지와 현실의 우선순위에 질 수밖에. (행복의 목표는 정하는데 5분도 안 걸린 것 같은데 목적을 생각하기까지 2달 + 5시간이 걸렸다.)


행복 패스포트의 목적부터 다시 확인했다.


- 글쓰기: 일상에서 평온하고 싶다. 이 평온함이 흘러넘쳐 나를 비롯해 현실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마사지해주고 싶다.

- 작곡: 내가 옆에 없더라도 내 주변 소중한 사람들이 힘들 때, 슬플 때, 기쁠 때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노래를 선물해 주고 싶다.

- 피아노: 그냥 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께 재롱떨며 미소 짓게 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하나 더 생겼다.

- 기부 마라톤: 평소에 생각하지 못한 소수와 세계에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누군가 나에게 내년 목표가 돈이라고 한다면 무엇을 위해인지 물어볼 것이고, 건강이 목표라고 한다면 건강해서 무엇을 하기 위해인지 물어보고 싶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은 다르다.’ 나는 여기에 한 문장만 더 추가하고 싶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걷는 이유에 따라 다르다.
행복을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그 목적에 따라 다르다.



오늘 걷고 있는 이유도 완주 목표가 아니라 내 마음을 마사지하기 위해 시작했었지라고 기억하니 평온이 밀려왔다. 이제야 ‘수월봉’ 정상부터 따라다녔던 차귀도와 와도의 절경이 눈에 들어왔다. 깊은 푸른색 바다를 따라 펼쳐진 화산 지질학의 살아있는 교과서, ‘엉앙길’에서는 눈과 몸이 즐거웠고, ‘당산봉’의 숲길에서는 메뚜기처럼 다시 몸이 가벼워졌고, 마지막 종점 용수포구까지 이어지는 ‘생이기정 바당길’에서는 앞에 꼭 손을 잡고 가는 커플도 부럽지 않았다. 부럽지가 않아~!!


동요로 시작해 현실의 끝판왕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로 끝난 오늘도 한 치 앞 모를 걷기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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