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이제야 독립합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90년대. 이혼이 많지 않았던 시기
수많은 수군거림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때
나는 생각보다 평온했고 두렵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혼에 대해 나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상처 받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하셨기 때문에
사실 그게 나를 흔들거나 무너지게 만들진 않았다.
단, 삶의 변화가 굉장히 크게 다가온 문제는
바로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였다.
평생 함께 살던 부모님 중 '누구와 함께 살고 싶니?'라는 질문은
13살의 소녀에게 간단하거나 녹록지 않은 문제였다.
많은 시간 동안 고민했고,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하기도 했다.
결국 결정을 했고, 부모님이 아닌 판사님께 편지를 썼다.
내 진심을 담아, 내가 왜 누구와 살고 싶은지 써서 전달했고
판사님은 내 결정을 받아들여주셨다.
그리고 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린 함께 살았고 엄마는 나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내가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엄마의 보호자라는 자각을 하게 된 일은 엄마의 수술이었다.
그 수술은 엄마의 간을 2/3 이상 절제하는 일이었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진행된 엄마의 수술은
나에게 "보호자"라는 이름을 갖게 했다.
수술 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설명과 함께 책임지겠다는 서명을 하는 것.
의료진이 엄마와 나를 앉혀놓고 함께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10시간이 넘는 수술, 3일간의 중환자실, 1개월의 입원기간에
오직 나 혼자 엄마의 보호자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
열리지 않는 중환자실 앞, 아무도 없는 새벽에 병원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열이 오를 때마다 어떻게 되는건 아닌지 걱정하고 두려움을 숨겨야만 하는 것.
바로 그때 이제 내가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구나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이런 경험은 아주 나중에. 나중에야 다시 할 줄 알았는데,
서른 중반. 나는 다시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고,
떠나보내는 그 시간까지 엄마의 유일한 보호자는 나였다.
사람들은 부모에게 일이 생기면 당연히 자식이 보호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막상 실제로 그 일을 경험하기 시작하게 되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경험해보기 전에는 자연스럽고 가볍게 '당연하지. 할 수 있어.'라는 마음뿐이었는데,
두렵고, 책임감의 무게는 너무 무거웠다.
나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 알 수 없고,
어떤 일이던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엄마의 생명과 연관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은 아니게 된다.
결국, 엄마의 보호자가 된다는 건
엄마의 약하고 아픈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고
무겁고, 무서웠으며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었다.
그 경험은 한동안 아무것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너무 썼고,
그 쓰디쓴 기억은 지금까지도 오랜 시간 지속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준비도 같이 시작해야 했다.
엄마가 없는 삶에 대한 나의 홀로서기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