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롱 May 26. 2024

아카시아 아래서

5월이 간다

 

 야근하느라 이틀을 회사 숙소에서 잔 남편이 집에 오던 날, 퇴근길에 전화를 했는데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며칠 만에 집에 오는데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음... 어르신이 암 같대."

 올해 팀장을 맡은 남편의 팀에는 내년에 정년을 앞둔 팀원이 있다. 부모님 뻘이라 형님이라고 하기도 뭐해서 우리끼리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남편은 어르신을 참 좋아해서 집에 와서도 자주 이야기를 했었다.

 "어르신이 커피 마니아시거든. 사무실 창가에서 보이는 카페가 하나 있는데 거기 불 켜지면 꼭 나를 부르셔. 똘아~ 커피 한잔할까~ 이렇게."

 "우리도 그렇게 여유 있는 어른이 되면 좋겠다."

 "그치. 더 잘해드려야지."

 최근 건강검진을 하신 어르신께서 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으셨다고 했다. 어쩐지 우울해진 우리는 그날 빈속에 소주를 들이켰다.

 "왜 좋은 사람들한테 나쁜 일이 일어날까."

 그날 아침 나도 속상한 일이 있었다. 회의를 하는데 같이 일하는 후배가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갔다. 나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동생은 작년부터 몸이 안 좋아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혹시 더 나빠진 건가 싶어서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픈 사람이 제일 힘들겠지만 아픈 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니야."

 "다들 안 아팠으면 좋겠다. 우리도 아프지 말자."

 

 매일 지나는 출퇴근 길에는 나무가 많다. 영혼 없는 얼굴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똑같은 선캡을 쓰신 할머니 세 분이 나무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고 계셨다.

 "아유, 이거 냄새가 아주 난리가 났네."

 "숨을 더 들이쉬라구. 이 좋은 거 많이 많이 맡아야지."

 무슨 냄새이길래 그러시나 싶어서 쓰고 있던 마스크를 슬그머니 내렸다. 내리자마자 아카시아 꽃냄새가 코를 찔렀다. 4년째 다니는 출근길에 아카시아가 있다는 걸 할머니들 덕분에 처음 알았다.

 "봄이 좋제?"

 "말해 뭐해~ 봄은 봄대로 좋고~ 여름은 또 여름이라서 좋고~"

 소녀들처럼 까르르 웃으시며 걷는 세 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무탈하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적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만 있다면.


 병원을 오가느라 지난한 5월을 보내신 어르신은 조직 검사 결과 다행히 암이 아니라는 결과를 받으셨다고 한다. 며칠 전 야근을 하기 위해 회사에 남은 남편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다고.

 "다음 주부터 내가 야근 많이 할게. 그동안 못한 거."

 "못 주무신 잠부터 주무세요."

 "그럼.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야지. 잔인한 5월이었어."

 "이미 돌아오셨으니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도 당신도 편안하길, 오늘 밤에도 큰 걱정 없이 잠들길 바란다. 이렇게 5월이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늙으니 비로소 보이는 남편의 지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