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 번 짤려봤습니다
회사에서 짤렸다. 팀이 해체됐으니 더는 출근하지 말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굵고 짧았던 해고 과정에서 회사가 범한 무례함, 무식함에 대해서는 굳이 열거하지 않겠다. 어쨌든 프리하지 못했던 프리랜서에게 예상 밖의 프리가 생겼다.
올해 2/4분기가 참 힘들었다. 여러 번 회사에서 나오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참은 게 이런 꼴을 보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소식을 들은 동료들에게 거의 비슷한 메시지를 여러 통 받았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어요
-고생 너무 많으셨어요
그 마음들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팀이 해체되지 않고 계속 회사에 다니는 게 더 고생 아니었을까. 다시 또 일자리를 찾아가야 하는 지금부터 새로운 고생이 시작되는 걸까. 누구도 답을 모를 질문을 안고 회사를 나왔다.
혼자 있는 시간은 아직 좀 힘들다. 집에 있어도 집에 있고 싶은 집순이지만 이렇게 평일 대낮에 집에 있는 건 어쩐지 불안하다. 가족들에게 한 달은 놀아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하루도 못 가서 자기소개서를 새로 쓰고 또 보냈다. 그러다 어제부터 남편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갑자기 시부모님을 뵈러 가기로 했다.
"아버님, 저는 들깨 수제비가 먹고 싶어요!"
오랜만에 얼굴을 들이민 무뚝뚝한 며느리는 당당하게 먹고 싶은 메뉴를 말씀드렸고 시부모님은 흔쾌히 맛집에 데려가 주셨다. 비빔밥도 수제비도 야채전도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점심을 먹고는 아버님 회사에 따라갔다. 아버님은 몇 년 전 은퇴 후 사업을 하고 계시는데 여러 번 놀러 오라고 하신 게 생각나서였다. 멀리 높은 산이 보이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아버님의 근사한 회사가 있었다. 바람 소리, 새 소리, 벌레 소리를 듣고 있으니 돗자리 깔고 누워서 한숨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풍경 보면서 일하면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도 않다. 사람들 모이면 부딪치고 마음 상하고 그런 일이 없을 수 없지."
그늘에서 아버님이 주신 시원한 포카리스웨트를 마셨다. 여기 오길 잘했구나, 싶었다.
"나 얼음 보리차 먹고 싶어."
"얼음컵의 맛을 알아버리다니!"
집에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러서 얼음컵 두 개와 나는 보리차, 남편은 배 음료를 샀다. 간이 테이블에 얼음컵을 올려놓고 보리차를 쪼록쪼록 붓고 있자니 한동안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 지금... 되게 괜찮다? 회사 짤려도 막 어떻게 되지는 않네."
"당연하지. 계속 괜찮을 거야. 두 달만 쉬어."
"두 달은 너무 긴데~"
내비게이션에 우리 집을 목적지로 찍으니 두 개의 경로가 나왔다. 남편은 왔던 길 말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나는 새로운 길 가는 걸 좋아하거든."
"안 가본 길은 좀 불안하지 않아?"
"그게 재밌는 거지. 안 가봤으니까 새롭잖아."
그러면서 남편은 노래 한 곡을 틀어달라고 했다.
"요즘 내가 자주 듣는 노래인데 되게 좋아. 여보도 알 걸?"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가사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Tonight We are young
오늘 밤 우리는 젊어
So let's set the world on fire
그러니 세상을 불태워 보자
We can burn brighter than the sun
우리는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날 수 있어
Fun <We are young>
회사에서 짤리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기에 나는 여전히 젊다.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