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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n Mar 16. 2023

이중섭 미술관 특별전 정직한 화공 이중섭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

지난 10월 국립현대미술관 MMCA <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전을 다녀온 후, 이번 제주 첫 미술관 방문지는 서귀포에 위치한 이중섭 미술관으로 정했다. 미술관을 방문하기 전에 이중섭 생가에 방문하여 이중섭 가족과 함께 생활했던 공간을 보았다. 한 명이 들어가도 비좁은 공간에서 4명의 식구가 생활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지지 않고 작품활동을 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행히도 생가 앞마당에 작은 정자가 놓여있고, 조금 더 걷다 보면 작은 공원엔 멋지게 의자에서 앉아있는 이중섭의 조형물을 만나 볼 수 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서귀포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풍광을 만나 볼 수 있다.  그 경치를 우두커니 바라다보면 어려웠던 서귀포 시절에 작품활동을 했던 이중섭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부산에서 한 달 정도 어려운 생활을 하던 이중섭 가족이 서귀포에 정착한 곳은 알자리동산이었다. 이 마을 반장 송태주와 김순복 부부는 이중섭 가족에게 1.4평 정도의 작은 방을 하나 내주었다. 당시 피난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서귀포 시대는 꿈꾸는 이상향처럼 묘사된다. 그 이상향 속에서 가족들이 유쾌하게 묘사되는 것은 전쟁의 가난과 공포를 잊고자 하는 이중섭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이중섭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이중섭 특별전 2부로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중섭의 유화∙수채화∙드로잉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가족에 대한 정직한 화공, 이중섭의 사랑과 그리움을 통해 바쁜 현대생활로 인하여 다소 소홀해지기 쉬운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기획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중섭 가족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원산에서 피난길에 오른 것은 1950년 12월 초순이었다. 부산을 거쳐 1951년 1월 중순 서귀포에 도착하여 그해 12월 중순까지 1년을 머물렀다. 서귀포에 머문 기간은 불과 1년이었지만 게, 가족, 아이들, 물고기 등 서귀포 관련 소재들은 이중섭 작품의 주요한 모티브로 작용하였다. 이중섭 미술관 인근에서 제주 풍경을 그린 『바다가 보이는 풍경』, 『해변의 가족』, 『사계』 등이 전시되었으며 특히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이건희 컬렉션 중에서 이중섭 미술관이 기증받은 이중섭 원화 12점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의 아내 이남덕 여사(야마모토 마사코)가 이중섭이 생전에 사용한 유품인 팔레트도 함께 기부하여 전시되었다. 1943년 '미술창작협회'전에서 5점의 작품을 출품하였고, 이때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였고 부상으로 팔레트를 받았다. 이중섭은 일본에서 그림을 그릴 때 이 팔레트를 사용하다가 당시 연인이었던 마사코에게 맡기고 귀국하였다. 사랑의 징표로 받았던 이 팔레트를 70여 년간 이중섭의 분신으로 생각하며 소중히 보관해 왔다. 그러나 이제 자신보다도 대중을 위해 이중섭미술관에 팔레트를 기증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 팔레트를 보며 작품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이중섭을 조금 더가까이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중섭은 '한국의 국민화가', '비운의 천재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감과 힘찬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은 서구적인 방법을 차용했지만, 주제에서는 향토성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런 이중섭의 예술세계 기반은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가고자 했던 그의 예술가적 삶에 연유한다. 일정한 거처 없이 전국을 떠돌며 외롭게 제작한 그의 작품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 새롭게 평가받게 된다.


이중섭 부인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오"


이중섭과 절친했던 시인 구상은 이중섭의 창작열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퍼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시대를 말할 때, 그리고 이중섭의 삶을 이야기할 때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 중 하나다. 은지화는 담뱃갑 속의 은지를 송곳과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홈이 생기도록 드로잉을 한 일종의 선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중섭의 은지화를 처음 미국에 알린 사람은 아더 맥타가트였다. 당시 대구미문화원 책임자였던 맥타가트는 이중섭 개인 전시회에서 3점의 은지화를 구입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했다. 그는 이중섭의 작품에 대해 "오래전에 잃어버린 전설과 제의로서 몽상적인 동양미술의 완정 한 일례"로 묘사했다. 은지화에는 게와 물고기, 아이들, 가족 등 서귀포와 관련이 깊은 소재들이 자주 등장했다.


이 전시를 통해서 이중섭의 삶과 예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이중섭의 작품 하나로도 그의 삶을 관통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화로 이중은 소를 그리기 위해 수없이 많은 소를 관찰하고, 두 아들에게 똑같은 그림을 그려 보내며, 자기 작품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더 좋은 작품을 그리면 그것을 바꿔주겠노라 약속하던 화가였다. 그는 작품을 하나의 완결로 보지 않았다. 이중섭의 그림은 다음을 위한 습작이면서 이전 그림에서 한 걸음 나아가 현재 진행형의 상태를 담고 있다.


이중섭의 '민족의 근원' 정신은 황소와 같은 소재로 집약되었고, 여기에서 더 발전한 '이상향'을 천진무구의 순수성으로 아이와 가족 형태로 승화되었다. 전쟁과 전후 복구기에 개인사적으로는 정처 없는 노마드처럼 작업해야 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일종의 연가이자 절규의 몸부림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모습처럼 순수성을 지향하면서도 황소처럼 민족의 투지를 상징화하기도 했다. 이중섭은 1950년대 전반의 화가였지만 한국 현대미술사에 불후의 명작을 남긴 거인이었다.


이번 미술관 방문을 통해 비루한 현실에서도 이상을 그려낼 줄 알았던 화가 이중섭의 삶과 예술에 대한 정신을 투영하며 현실 속에서 고민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전시이었기를 바라본다. 제주도에서의 첫 미술관 여행이었던 이중섭 미술관은 반나절의 시간 동안 가족에 대한 생각과 성찰의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더불어 짧은 생애를 살았던 그의 삶 속에서 매일매일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삶의 자세와 정신을 나의 삶 속에도 반영되길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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