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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레네 Feb 26. 2024

학생부장, 없으면 제가 할게요

잘한 짓인지 미친 짓인지

학생부장. 지금은 인성인권부장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학생들의 인권과 안전을 위한 여러 업무들을 도맡아 하지만 거의 주된 업무가 학교폭력 담당이기에 모두가 기피하는 업무다. 그래서 대부분 학교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젊은 남자 선생님들에게 강요하다시피 떠맡겨진다.


올해 2월도 똑같은 그림이었다. 올해 나는 10년 차 교사라 이 그림을 10년째 보는 중이다. 젊은 남자 선생님들을 돌아가면서 밀실로 부른다. 당연히 모두가 어려울 것 같다고 답한다. 이제 폭탄 돌리기가 시작된다. 결국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고 마는.


작년엔 그러다 결국 1급 정교사도 달지 못한 저경력 남교사에게 학생부장 자리가 넘어갔었다(3년 차 까지는 2급 정교사, 4년 차에 1급 정교사 자격이 주어진다).

너무 미안했다. 내가 맡긴 것도 아닌데, 그냥 너무 안타깝고 미안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이 선생님이, 그저 젊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폭탄 돌리기 게임에 참여해야 했고 결국 당첨이 되셨다는 게.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물론 아이들이 남교사와 여교사 앞에서의 행동이 다르긴 하다. 남교사가 해줘야 수월한 부분이 훨씬 큰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남선생님들 입장에선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학생부장 후보에 서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어떤 학교는 모두가 거부하여 신규 선생님께 맡겨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기간제 선생님에게 맡겨지기도 한다. *이 부분은 정말 교육청 차원에서 개선이 필요한 듯


어찌어찌 1년이 흘렀고, 올해 2월이 되었다. 업무분장은 똑같은 그림으로 흘러갔고, 올해는 업무분장 발표 이틀 전까지 학생부장이 정해지지 않았다. 학교에 잠깐 들렀다가 그 소식을 우연히 듣곤 마음이 무거웠다.


그날 오후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잘 되지 않고 계속 불편했다. 이 불편함이 대체 뭔가요, 계속 주님께 물었지만 한동안 답을 주시지 않았다. 그렇게 기도를 이어나가는데, 문득 ‘학생부장을 네가 하라’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쳤고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주님은 이 마음에 확신을 주셨고, 이런 생각을 통해 끝내 나를 치셨던 것 같다.


예수님 믿는다면서, 예수님처럼 산다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게 뭔가.


손해보지 않으려 하고, 힘든 것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마음. 크리스천으로서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구별이 없는 삶. 이런 것들을 기도 중에 회개하게 하셨고, 결국 나는 학생부장을 하기로 결심했다.


마음이 바뀔까 봐, 기도가 끝난 후 바로 교감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교감선생님은 정~말 기뻐하셨다. 그리고 고마워하셨다. 그 자리가 안 정해져서 너무 힘들었는데, 정말 고맙다고.


그렇게 최종 업무분장이 발표되었다. 막상 확정이 되고 나니 하루에도 마음이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한다.

잘해보자, 하다가도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기도 한다. 아무도 나한테 하라고 한 적 없는데, 대체 왜?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크다. 그러나 나에겐 남들에게 없는 무기가 있다. 기도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죽음을 이겨냈다는 것.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도 나는 기도할 수 있으니까, 그럼 주님이 힘을 주시고 그 상황에 맞는 지혜를 주실테니.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일이어도 그게 죽음보다 힘들겠나, 싶은 생각이 들면 또 알 수 없는 힘이 샘솟는다.


어떤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어떻게 그런 어려운 결정을 했냐고, 응원한다고 말씀하시며 토닥여주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경우가
죽음인데, 그걸 견뎌낸 선생님이
뭘 못 해내겠어. 잘 해낼 것 같아.


여자가 학생부장 돼서 못 미더워하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격려를 받으니 눈물이 났다. 잘하리라 믿어주셔서 감사했다.


warm and firm.

따뜻하지만, 단호하게. 단호하지만, 따뜻하게.

내가 지향하는 바이다.

애들은 저 선생님이 진짜 쎈 사람인지, 쎈척하는 사람인지 금방 안다. 그래서 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진 않으려 한다. 그냥 내 스타일로, 나만의 강점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갈 거다. 무섭게 강압적으로 아이들을 잡으려는(물론 이런 것도 필요하다) 교사들이 한 가지 놓치는 것은 그 아이들이 교사에게 당한 것을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푼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학교든 사회든 악이 재생산되어 악의 총량이 증가하게 되는 걸 느낀다. 처벌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이며, 그러한 자발적 책임은 먼저 아이들의 마음이 열려야 가능하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충분히 아이들의 마음에 공감해 주되, 자기 행동엔 충분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그들에 대한 단호한 경계도 잃지 않으며, 1년 농사 잘 지어봐야지. 사실 말이 쉽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래서 더 기도할 것이고, 더 그분을 의지할 수 있는 업무를 맡게 되어 지금은 감사하다.


2025년 1월 졸업식 때 환호성을 지르곤 한 해 잘 마무리할 그날을 꿈꾸며.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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