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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레네 Mar 19. 2024

교사가 꼭 무서워야 할까?

귀신의 집도 아니고...

교사가 무섭게 해야 아이들이 잘 잡힌다는 생각은 참 역사가 긴 뿌리 깊은 생각이다.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무섭게 아이들을 잘 잡는 교사들을 보면 부러웠던 것 같다.


특히 내가 맡은 학생부장의 자리는 더 그렇다.

무섭게 아이들을 잡아야 하는 위치다. 다른 교사들이 그것을 요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3주간 학생부장을 맡아보며 내 안에 이런 의문이 든다.


무섭게 하면 아이들이 정말 변화되는가?

무섭게 하면 정말 아이들이 교사의 말을 잘 들을까?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눈앞에서의 일시적인 복종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청을 의미한다. 교사가 무섭게 하면 정말 아이들이 우리의 말을 잘 들을까?


3주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그간 몇 건의 학폭 사안이 있었고, 그때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연 것은 무서운 처벌이나 징계가 아니었다.


가해 학생의 마음이 열려 진정한 사과로 이어진 순간들은 바로 그들의 억울함을 들어주었을 때였다.


가해 학생에 대한 내 안의 판단을 멈추고, 그 순간만큼은 존재와 행동을 분리하려 노력했다. 잘못된 행동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되, 그 학생들의 존재 자체는 인정해 주기 위해 그들 내면에 있던 나름의 ‘억울함’을 들어주었다.


그랬더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뿐만 아니라, 학급 내에서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학생들을 먼저 나서서 제지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여전히 이렇게 처벌과 징계에 앞서 대화로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 회의적인 동료 교사들도 많다. 나조차도 가끔은 예의 없는 겉모습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절제하고 학생들의 존재만을 봐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한다. 참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낮아져 이 땅에 오셨듯. 한 영혼을 살리려면 낮아져야 한다. 한 알의 밀알처럼, 내 자아를 누르고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학생부장으로서, 내가 가진 권위로 학생들을 찍어 누르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참 많다. 그럴 때마다 또한 이 사실을 기억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이 힘의 관계가 그대로 교실에 반영된다는 것. 교사에게서 받은 수치심, 아이들은 그 수치심을 교실 내의 약자에게 그대로 전가시킨다. 그게 바로 학교폭력의 시작이다.


학교폭력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교사가 먼저 낮아져야 한다. 학교 내에 존재하는 힘의 논리를 무너뜨려야 한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대다수 학생들이 학교폭력을 하지 않는 것은 교사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충분히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존중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타인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 것이다.


교사가 낮아져야 한다는 것은, 봐주거나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지 않고 넘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무섭게 하지 않아도, 가르칠 수 있다. 무섭게 잡들이는 것과 단호하게 대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용납되지 않는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다루되, 아이들의 존재 자체는 받아들여 주고 싶다. 나보다 낮은 존재라 여기며 권위로 찍어 누르기보다 한 명의 인격체로 존중하여 그들 내면을 온전히 들어주고 공감해 줄 때... 분명 처벌과 징계가 하지 못하는 위대한 일들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친히 본을 보이신 십자가의 능력이기도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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