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레네 Mar 25. 2024

학부모님께, 세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학생부장은 학부모에게 무슨 얘길 할까?

3월에 학교마다 실시하는 학부모 교육과정 설명회.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학교폭력예방교육을 실시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할까? 몇 주 전부터 엄청 고민했던 것 같다.


기존의 방식대로 그냥 학교폭력의 개념은 무엇이고 유형은 무엇이 있고, 사안이 발생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나눠준 연수자료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고 싶지 않았다.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마주쳐야 하는 학부모들, 그들이 바쁜 일정을 제치고 제 발로 와주신 기회인데! 그냥 이대로 진부한 학교폭력의 개념만 읊어드리고 보내고 싶지 않았다.


찾아와 주신 학부모님들의 눈을 일일이 마주치며, 학생부장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눈빛에 담아 전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이대로 날려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뒤에 담임과의 상담시간도 있어 내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기에, 더욱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이 자리에 오시는 학부모님들은 모두 아이가 잠재적 학교폭력 피해자일수도, 가해자일수도 있는 분들인 것이다. 이 분들께 내가 눈을 보며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고민 끝에, 세 가지 부탁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1. 상대 아이가 내 아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번만 해주세요.
2. 우리 모두는 같은 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3. 학교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학부모님들께 드린 세 가지 부탁


“어머님 아버님,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저 아이도 누군가 애지중지 키운 자식입니다. 저도 애를 낳기 전엔 몰랐어요. ‘저 엄마 왜 이렇게 유난인가, 왜 지 새끼밖에 모르나.’ 근데, 애를 낳아보니 이해가 되더라구요. 내 아이가 학교폭력 피해자가 되면 눈에서 피눈물 납니다. 상대 학생 가서 당장 패 죽이고 싶으시죠. 그런데요, 반대로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답니다. 내 아이가 가해자로 몰리면 내 아이 앞날에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생길까 봐, 내 아이가 한 것 이상으로 억울하게 처벌을 받을까 봐, 필사적으로 막고 싶고 처벌 수위를 낮추고 싶은 것도 부모 마음이지요.”


“저를 한 번 따라 해 주실래요?“

<저 아이가 내 아이일 수도 있겠다>

“네 감사합니다. 이 마음 하나면... 우리가 부모로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절제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최선의 결과를 이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 번째 부탁은요, 우리 모두가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 일 없을 땐 이 사실을 다 잘 인정해 주시는데 갈등이 생기면,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그때부터 교사가 적이 되고, 다른 학부모가 적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더라고요.


어머님 아버님! 저와 여러분은 00중학교 교육 공동체로 만났어요. 공동체라는 것은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뜻이거든요. 우리는 어떤 목표를 지니고 있을까요? 바로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겠죠.


그 ‘잘’에는 무엇이 담겨있다고 생각하세요?

내 아이가 아무 갈등 없이 편하게 학교 생활 하는 것?

내 아이가 잘못했어도 처벌을 면하는 것?

처벌받아도 생기부 기재 안되게 끝까지 어떻게든 막는 것?

잘못을 했어도 불이익당할 수 있으니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것?


다수 학부모님들이 여기서 고개를 저어 아니라는 표시를 해주셨다. 잘 경청해 주시고 계시다는 의미로 다가와 정말 감사했다.


“네, 아니죠. 어머님 아버님들과 동일하게 저희 교사들도 모두 한 가지 목표로 일하고 있답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예요. 학교에서 내리는 처분, 징계에 대해서 물론 억울한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한 가지 목표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이 사실을 기억해 주신다면, 저희가 함께 더 협력하여 이 목표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갈등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우리 아이들은 갈등을 겪고 이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큰 성장을 경험할 것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그로 인해 생겨난 피해에 대해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아이들은 정말 우리의 바람대로 잘 클 것입니다.


“마지막 부탁입니다. 학교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저희 학교는 회복중심 생활교육 실천학교입니다. 성급하게 피해자의 회복과 아무 관련 없는 징계/처벌을 내리기 전에, 충분한 대화의 시간을 가집니다. 이는 처벌의 수위를 낮추거나 해야 할 징계를 하지 않고 그냥 넘기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성급하게 내려진 처벌이 원한과 보복, 2차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피해자가 입은 피해는 물론 가해자의 입장도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작업입니다.


이 과정을 충분히 거치고 나면 가해자는 처벌에 대해 억울하게 느끼기보다 자발적인 책임으로 인식하게 되고, 이는 피해학생과 가해학생 모두 안전한 학교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발판이 된답니다.


“그래서 저희를 믿어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대화로 해결한다는 말을 들으시면 부모님들은 종종 학교가 화해를 종용한달지, 사건을 그냥 덮으려고 한다고 오해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희가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의 기준은, 항상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우리 아이들입니다. 충분히 고민하고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최선의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


“어머님 아버님은 학교에서 어서 신속히 처리해서 처벌해 주길, 징계를 때려주길 바라실 때가 많지만 저희는 그 처벌의 여파, 그 이후에 지속될 아이들의 학교생활까지 고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중할 수밖에 없고,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엮여있는 관계까지도 고려하여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안 하나하나를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믿어주시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세요.
우리 아이들, 제가 대화를 통해 깊이 만나보면 저마다 내면에 갈등을 해결하는 힘이
다 있더라고요.

아이들 안에 이미 지혜가 있더라고요.“


“저의 세 가지 부탁, 들어주실 거죠?”


무사히 설명회를 잘 마치고, 이후에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 위원분들을 통해 강의 내내 학교가 형식적으로 연수 내용을 전달하기보다 학부모들을 진솔하게 대하는 모습이 느껴져 좋았다며 피드백을 전해 들었다. 학생부장으로서 첫 학부모 연수였는데,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이분들을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 어떤 문제와 어떤 모습으로 만나 뵐지 두렵지만 아이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나와 학교의 마음이 정말 잘 전달되었길 간절히 바래본다.

이전 06화 교사가 꼭 무서워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