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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못한 약속

by 에이레네

엊그제 자려고 눕기 전, 아이를 씻기고 먼저 눕혔다.

“이제 엄마 씻고 올게. 혼자 책 읽고 있어.”

“몇 분 있다 올 건데?”

“음... 100까지, 아니 200까지 세고 있어. 그럼 엄마 다 씻고 올 거야. 빨리 세지 말고 천천히 세야 해.“


퇴근 후에도 계속되는 육아 일과 중 따뜻한 물에 혼자 씻으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시간이 유일한 낙인데...

그마저도 아이가 기다리는 시간 안에 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 야속했다.


‘200이면 혼자 세다가 금방 잊어버리고 딴짓하겠지.‘ 충분히 혼자만의 목욕시간을 즐기다 나올 참이었다.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먼저 하고 본격적으로 씻으려던 찰나, 머리끈이 필요해 나는 다시 아이가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은 그때, 방 안에서 숫자를 세고 있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치한 지 꽤 지났는데 아직까지 숫자를 세고 있다니, 그 목소리가 귀여워 한동안 문을 열지 않고 문밖에서 듣고 있었다.


“칠십오, 칠십육, 칠십팔, ...”


하나씩 빼먹는 수 세기에 속으로 큭큭 웃음도 나왔다.

한 이삼십 세다가 말 줄 알았더니, 칠십 대까지 천천히 세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


그 귀여움에 큭큭대며 웃다가, 갑자기 마음 한 켠에서 예고 없이 아이를 향한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눈물방울이 맺혔다.


남편은 죽기 전 일주일을 병원에서 보냈다. 나는 남편 곁을 떠나지 못하고 간호하느라, 아이를 돌볼 틈이 없었다. 갑자기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던 그 일주일, 아이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분명 엄마 아빠가 곧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또 약속했었다.


그렇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정확히는, 반절만 지켜진 셈이다.

일주일 후, 아이의 눈앞에 엄마는 까마귀 같이 이상한 검은 옷을 입고 퉁퉁 부은 눈으로 나타났고,

아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내 아이의 아빠에 대한 기억은

그날의 약속에서 멈춰있다.

여전히, 올해 여섯 살이 된 내 아이는

아빠가 왜 죽었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아빠는 언제 오냐고 물어본다.


이미 수없이 많이 설명했지만,

아빠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갔다고,

아빠는 이제 안 온다고,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만날 수 있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아빠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있어서.


200을 세는 동안 얼른 씻고 돌아올 거란 엄마 말에,

1이 75, 76이 되도록 하나하나 수를 세던 내 아이.

그렇게 아이는 내겐 지옥 같았던 그 일주일 동안 아빠를 기다렸겠지. 아빠가 약속을 지킬 거라는 믿음으로.


나는 방문을 열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어제는 자려고 누운 밤, 아이가 대뜸 말했다.

“엄마, 나는 얼른 백 살 되고 싶어.”

“왜?”

“그래야 얼른 죽어서 하나님 나라 가지. 그래야 아빠 만나지.”

“... 아빠 보고 싶어?”

“응. 나 아빠 만나고 싶어. 아빠는 왜 안 와?”


천국은 슬픔도 눈물도 없는 곳이랬는데, 이 날 만큼은 남편도 아이의 말을 듣고 하늘에서 조금은 울지 않았을까.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미안해서.


그날, 씻고 온다던 엄마를 기다리며 75, 76, 78을 세던 아이의 목소리에 문밖에서 한참을 울다가,

나는 더 이상 아이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싶지 않아 방문을 벌컥 열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가... 사랑해! “

“엄마, 아직 200 안 됐는데 일찍 왔네?”

아이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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