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
얼마 전 아이가 보고 있는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미를 죽인 적이 있다.
거미가 죽은 것을 보고 아이는 아빠가 떠올랐나 보다.
“엄마, 거미가 죽었네. 예준이 아빠처럼.”
한 인간의 죽음이 저 거미에 비유되다니. 우습고 하찮고 허탈한 기분이었다.
보통 모기의 죽음, 파리의 죽음, 벌레의 죽음에서
키우던 식물의 죽음, 고양이나 개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러다 점차 인간의 죽음이란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 아니었나.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의 죽음을 미처 배우기도 전에, 눈앞에 버젓이 살아있던 사람이란 존재의 죽음을 먼저 겪어버린 아이의 내면.
그 안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짐작해 본다.
저 거미가 아빠처럼 죽었다고, 거미 가족들은 슬프겠다고 하는 이 아이의 머릿속이 궁금해진다.
해가 갈수록, 세상에 대해 더 배우고 하나씩 알아갈수록, 아이는 아빠의 죽음을 나름대로의 방식과 속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내 아이의 방식이 가끔 이렇게 겉으로 표현될 때면, 때론 잘 버텨가던 내 내면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네 살 때가 다르고, 다섯 살 때가 다르고, 여섯 살 때가 또 다르다. 그 변화를 추적하는 것도 나름 흥미롭다.
그러다 문득, 내가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매년 달라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이만 크는 게 아니라, 나도 한 해 한 해 자라고 있지 않을까.
서른하나의 나, 서른둘의 나, 지금 서른셋의 나는 남편의 죽음을 매년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른 방식으로 아파하고, 매년 다른 기분과 방식으로 애도하고 그리워하고, 매년 다른 마음과 태도로 그의 부재를 인지하며 통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
추위가 물러가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봄날이 되면 이상하게 더 시리고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추운 계절엔 시리고 아픈 탓을 추운 날씨에라도 실컷 할 수 있었는데. 내 마음이 아픈 것을 애써 감출 수 있었는데.
모두가 춥고 시린 계절이니까, 나도 그냥 그렇게 아픈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는데.
봄은 진작 시작되었지만, 피부로 와닿는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벌써 두렵다.
벚꽃이 두렵고, 그 아래를 거니는 연인들이 두렵고,
남편이 떠난 5월이 성큼 가까이 온 것이...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 찬란한 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더 가련한 인생은 또 없을 거다.
어느 땐 울적해지겠지만,
어느 땐 아파하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힘을 내서 내 사랑하는 아이와, 또 내가 아끼는 많은 다른 이들과 이 봄을 만끽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 봄이 가고 또 그다음 봄이 올 때면
일곱 살의 내 아이와, 서른넷의 내가
아빠와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또 달라지겠지.
그때의 나는 좀 더 담담해져 있을까.
조금 더 단단해져 있을까.
더 여유롭고 편안해져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