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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약산진달래 Apr 21. 2024

보리밭에서 찍은 사진

어디가 좋을까? 집 앞마당에서는 딱히 좋은 배경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앞산이 보이기는 했지만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뒷밭으로 나가보자. 뒷밭에는 이제 여물기 시작한 보리밭이 산자락 끝까지 펼쳐진 듯 보였다.  뒷밭 가득 심어놓은 보리가 내 허리를 훌쩍 넘을 정도로 자라  푸른 물결로 넘실거렸다. 그래 배경으로는 이만한 장소가 없겠어. 나는 생각했다. 사진 찍을 장소로 딱이었다.

서울에서 온 이모는 세련된 파마머리를 하고, 얼굴은 백옥처럼 하얗다. 무릎까지 내려온 밤색 바바리코트의 허리띠를 리본모양으로 여맨 모습이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이모는 앞 머리를 이마 뒤로 곱게 넘겼지만 머리 정수리는  볼륨이 살아있었다.  목덜미 아래쪽으로 내려온 뒷머리카락은  밖으로 컬이 부드럽게 나 있었다. 엄마도 어깨까지  파마머리였지만  머리 전체가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다.  이모의 얼굴은 엄마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로 예뻤다. 그뿐만 아니다. 이모는 말씨도 부드럽고 천사처럼 고왔다. 투박하기 그지없는 엄마의 시골 사투리와는 달랐다. 그런데 엄마의 언니라니 믿기지 않았다.

엄마에게 언니가 있는지 알았지만 이렇게 멋진 분일지는 몰랐다. 갑자기 찾아온 이모 때문에 방안에 있던 우리 형제들은 마당으로 쫓겨나듯 나갔다. 나는 방 안에서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고 마루로 올라가 방문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다. 아버지 엄마 그리고 이모가 방 안에서 도란도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련된 목소리로 차분히 이모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면 언제 나오질 몰라서 인사차 내려왔어."

"언니 그럼 이제 못 보겠네요"

엄마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엄마를 잘 부탁해"

이모는 외할머니를 엄마에게 부탁했다. 이모의 목소리에서 수분기가 느껴졌다. 이모가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것 같았다.

"장모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무뚝뚝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친절하게 대답했다.

이모가 들고 온 밤색 가죽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안 이야기를 안 들은 척  나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이모가 방문을 열었다.  '벌커덕' 방문이 열리자 나도 마루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모의 손에 네모난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이모가 엄마에게 말했다.

" 사진 찍자. 너랑 제부랑 그리고 아이들도"

"남사스럽게 무슨 사진은"

이모를 뒤를 따라 방에서 나오던 엄마가 말했다.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모르니 너랑 제부 기념으로 사진 찍어 가려고요 "

엄마는 좋으면서도 쑥스러운 것 같았다. 방에서 나온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대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찍어야겠네"

갑자기 엄마의 행동이 부산스러워졌다. 농을 뒤지기 시작하더니 하얀 가디건을 꺼냈다 마량 장에 가거나 외출할 때만 입는 옷이었다.

"애마리오 옷 갈아입으시오"

엄마는 붙박이농에서 꺼낸 회색 점퍼를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아버지에게   건넸다.

마당으로 나온 이모가 사진 찍을 만한 장소를 두리번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사진 찍기 좋은 장소를 찾아 나의 발도 빨라졌다.


"어디서 사진을 찍으면 좋을까?

"이모 저기 뒷밭에 보리밭에서 찍으면 어때요?"

나는 초록으로 물든 뒷밭으로 이모를 안내했다. 보리밭으로 먼저 뛰어간 나는  따사로운 봄볕에  여물이  들어가는 보리대를 습관적으로 하나 뽑아 아무렇지 않게  보리피리를 불렀다.

"삐삐 필리피 필리피 삐"

"아이고 가시내야  이제 보리 여물이 들어가는데 그것을 뽑냐?"

옷매무새를 마무리하고 뒤따라 오던 엄마가 내가 내는 소리를 듣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렇다.  이보리는 우리 가족의 식량인 셈이다. 부드럽고 달디달은 흰쌀밥만 먹고 싶은데 언제나 누런 꽁보리밥을 섞어 먹어야 한다.

"어머 보리피리구나 보리피리도 잘 부는구나 "

카메라를 들고 따라오던 이모가 보리피리소리를 들으며 그립다는 듯 말했다. 나는 괜스레 부끄러워져  보리피리를 땅에 살며시 떨어뜨렸다. 투박한 엄마랑은 너무 달라도 달랐다.

"아부지 여기가 사진 찍기 좋을 것 같아"


아버지에게 내가 말했다. 이모도 내가 정해준 장소가 맘에 들었는지 엄마랑 아버지를 보리밭 안으로 인도했다. 보리밭을 배경으로 엄마와 아버지가 섰다. 아마 결혼사진을 찍고 난 후 처음 찍어보는 사진일 것이다. 엉거주춤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카메라를 든 이모가 말했다.

"좀 다정하게 서봐요. 제부 동생 손 좀 잡아봐요"

이모의 말에도 아버지는 전봇대처럼 서있기만 했다. 엄마는  머뭇거리다 아버지 어깨에 팔을꼈다.

"그럼  하나 둘 셋  김치 하며  웃으세요?"

'하나 둘 셋"

이모가 카메라를 들고 외치자 무뚝뚝하던 아버지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엄마도 웃음을 지어보려고 살짝 입을 벌렸다

"김치"

이모가 다녀 후 며칠이 지났다.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  편지 봉투 안에는 그날 찍은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엄마의 언니라고 믿기지 않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련된 미국으로 떠난 이모 사진도, 흰머리에 쪽진 머리를 하고 스웨터를 입고 있는 외할머니 사진도, 개구쟁이 같이 웃고 있는 우리 형제들 사진도 있었다.  나는 엄마와 아버지가 보리밭에서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사진 이후 처음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엄마는 아버지보다 키가 컸다. 아버지의 손가락에는 여전히 담배가 들려 있었다. 숱이 많고 위로 꼿꼿하게 선 아버지 머리가 여물어 가는 보리밭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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