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러므로 삶에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
- 빅터 플랭클 -
내 동생은 나보다 두 살 어리다. 어릴 때부터 잘생긴 외모 덕분에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역 탤런트 활동을 시작해 TV 드라마에 출연하고, 전과 모델로도 나와 학교에서 유명해졌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탤런트 동생을 둔 형'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이 배역을 맡아 집에 돌아오는 날은 두려웠다. 아버지가 동생에게 대본 연습을 시키셨는데, 그때마다 집안 식구들은 불안에 떨었다.
부모님이 가게를 운영하셔서 바쁘다 보니, 동생이 야외 촬영을 혼자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셔서 용돈을 많이 주셨는데 이게 문제가 되었다. 동네에 동생에게 돈이 많다는 소문이 돌자, 나쁜 형들이 접근해 동생을 데리고 다녔다. 결국,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셨고, 어느 날 동생을 큰 각목으로 구타하면서 함께 어울렸던 형들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의 모진 매질과 정신적인 학대는 동생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동생은 활동을 오래 해서 주변에서 계속 캐스팅 제의를 받았지만, 부모님이 거절하셨고, 무엇보다 동생이 힘들어해 결국 탤런트를 그만두었다. 그 후로 동생은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공부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거친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무서운 존재였던 아버지는 형편에 비해 무리한 논현동 이층 집을 구입하시고, 부족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셨다. 덕분에 동생과 나는 아버지로부터 해방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이 되고, 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가 대출 상환을 마쳤다고 생각하시고 영구 귀국하셨다. 하지만 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학원비랑 생활비가 늘어나면서 대출상환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날부터 논현동 우리 집은 매일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되었다. 동생에게는 중요한 시기였는데, 다시 가출을 시작했고 나는 집에서 엄마를 보호하며 틈나는 대로 동생을 찾아다녔다. 결국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우여곡절 끝에 동생과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버지는 동생이 곧 고3이 되는데 뒷바라지가 필요하다며, 대학교 다니는 내가 부담되니 군대에 가라고 하셨다. 가출 한 번 못 했던 나는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입대를 신청했다. 동생이 고3이 되어 대입 준비를 할 때 내가 입대하려니 마음에 걸렸지만,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영장이 나오자마자 입대했다.
집을 벗어나 군에 갔지만, 그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그때 동생이 무서운 집에 혼자 남아 얼마나 힘들었을까...
"형, 군대 좀 미루면 안 될까? 나 혼자 있는 게 정말 무서워."
이런 동생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고 입대를 한 게 두고두고 미안함으로 남게 되었다.
군에 간 이후로 동생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 악화되었고, 가출도 잦아졌다. 제대로 신경 써주는 가족이 없었기에 대학도 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강요로 원하지 않는 자동차 정비 직업 훈련을 받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시간이 흘러, 제대를 한 1996년 6월 24일은 하루 종일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에 흠뻑 젖어 2년 2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을 나가셨고, 동생은 집을 나간 상태였다.
동생은 대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신분이라 바로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입대하지 않으면 탈영으로 간주하여 범죄자가 될 수 있어, 제대 후 두 달 동안 수소문 끝에 동생을 겨우 찾아 입대를 설득했다. 어렵게 입대할 때 동생이 군대에서 고참들과 싸우거나 탈영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도피처가 필요했던 동생도 군에 잘 적응하며 새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동생은 무사히 군대를 마치고 전역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광화문에 있는 큰 음식점에서 서빙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잘생긴 외모와 시원시원한 성격 덕분에 동생은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인기가 많았다.
광화문 가든의 메인 셰프님이 동생을 좋게 보셔서 요리를 가르쳐주셨고, 그 인연으로 동생은 셰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길이었고 내가 동생에게 힘든 길을 걷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