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화폐
8장 화폐
“돈은 양으로 따질 뿐
질로는 따지지 않는다.”
- 게오르그 짐멜
경제학자 칼 폴라니(1886~1964)는 부(富)의 여러 형식 중 오직 화폐만이 한계가 없다고 지적하며, 자본 축적의 부조리에 대해 인상 깊은 말을 남겼습니다. “궁전 다섯 채를 짓고자 하는 왕자도 궁전 5천 채를 짓는 데는 망설일 것이다. 하지만 궁전 5천 채에 해당하는 돈을 찍어내는 일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물욕은 화폐 없이도 가능하지만, 무한한 치부욕은 오직 화폐로만 가능합니다.
칼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를 실물인 ‘사용가치’와 화폐인 ‘교환가치’로 처음 구분한 철학자였습니다. 인간 욕망은 실물에 한계가 있습니다. 가령 아무리 많이 먹어도 쌀 수십만 가마를 쌓아두는 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하루 다섯 끼를 먹는다 해도, 그 많은 쌀을 다 먹을 수도, 제대로 보관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죽 한 그릇이, 배부를 때 산해진미보다 나은 법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갈레노스(129~216)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발 열다섯 켤레가 있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두 켤레만 번갈아 신어도 족하지 않은가?”
반면 화폐 축적에는 끝이 없습니다. 1억 원이 있으면 10억 원을, 10억 원이 있으면 100억 원을 원하게 됩니다. 숫자에 끝이 없듯, 화폐에 대한 욕망에도 끝이 없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부(富)를 단지 화폐 축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돈은 인간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지 못하지만, 생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걸 사고팔 수 있는 만능열쇠입니다.
이처럼 본말이 전도되면, 사람들은 돈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물과 화폐는 다릅니다. 쌀과 옷, 집, 자가용처럼 구체적인 물건에 대한 욕구는 그 하나하나가 무한하지 않습니다. 오직 돈을 갖고자 하는 욕망만 무한합니다. 돈으로 자신의 ‘미래 가능성’을 확장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정통’ 경제학은 이러한 돈에 대한 인간 욕망을 전제하며, 희소성을 ‘무한한 욕망과 유한한 수단의 간극’으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적게 일하고 적게 먹으며 여가를 즐기려는 사회에도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될까요?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희소성 원리가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희소성과의 투쟁이 인간 숙명이라고 단정하는 ‘정통’ 경제학에 현혹되어, 과로와 일중독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희소성은 물건이 아니라 화폐에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물건에 대한 욕구는 어느 정도 채워지면 포화 상태에 이릅니다. 하지만 돈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정한 기준 때문에 희소성에 시달립니다. 남태평양 제도의 원주민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정통 경제학은 ‘희소성’을 자연법칙인 양 가정해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화폐 외에는 무한한 탐욕의 대상이 없습니다. 희소성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부족하다고 규정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인간 욕구는 대부분 구체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물건이 항상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령 ‘살 집을 짓는 일’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때 욕구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집이 완성되는 순간 욕구는 충족됩니다. 집을 짓는 데 목재나 벽돌이 무한히 필요한 건 아닙니다. 간디(1869~1948)는 “신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건에 대한 필요는 한정적이고 충족 가능하지만, 돈에 대한 탐욕은 끝없이 확장되어 그 욕망을 채우는 데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상품을 화폐로 비교할 때,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판단합니다. 사용가치는 물건을 실제로 쓰는 데서 나오지만, 교환가치는 다른 상품과의 거래에서 나타나는 상대적인 가치입니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교환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유용한 물건이라도, 그 유용성 자체는 거래에서 직접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폐는 상품의 질적인 사용가치를 양적인 교환가치로 전환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 전환 과정에서 ‘기회비용’을 보았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상품을 질(質)과 무관하게 양(量)으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자본』(1867) 첫머리에서 “서로 다른 상품의 등가(等價) 형태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모든 어려운 문제를 이 한 질문에 함축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물건을 양으로 비교할 때, 결국 질적으로 같다고 전제하지만, 이는 사실일 리 없습니다. 물건마다 고유한 특성과 의미가 있어, 서로 쉽게 비교될 수 없습니다. 질을 무시하고 양으로만 판단하는 건 본질적으로 잘못된 접근입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질은 비교하기 어렵고, 대체로 자의적입니다.
그럼에도 화폐는 모든 걸 양으로 환산합니다. 우리는 그 영향으로 질적인 문제마저 양적으로 재단해 잘못된 판단을 내립니다. 예컨대, ‘내가 대학원과 유학에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과 왜 내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지?’라든가, ‘나는 4년제 대학을 나왔는데, 2년제 출신과 왜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지?’라는 식으로 질적인 가치를 양으로 바꿔 비교하는데 익숙해졌습니다.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배움의 질을 투자한 시간과 돈으로 수량화해 우열을 나누고 차별합니다. 더구나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일 수 있다는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습니다.
주관적인 경험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누구도 내 경험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상을 수량으로 파악하고 계산함으로써, 진정한 사유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너는 따귀 한 대만 맞았잖아, 나는 다섯 대나 맞았어’라든지, ‘너는 단 일 년만 군 복무했잖아, 나는 삼 년이나 했어’ 같은 표현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따귀 한 대가 어떤 이에게는 열 대보다 더 아플 수 있고, 복무 일 년이 누군가에겐 십 년보다 더 긴 세월일 수 있습니다.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 곧 퀄리아(qualia, 지각이나 감정, 체험이 지닌 특수하고 주관적이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질)입니다. 질적인 경험을 수량화하는 순간, 우리는 사태를 제대로 사유할 수 없습니다. 내 고통이 아무리 남의 고통보다 못해 보여도, 그건 남이 결코 겪어보지 못한 나만의 고통입니다. 고통은 그걸 경험한 개인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사고방식은 ‘최대다수[양]의 최대행복[질]‘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영향에서 비롯된 면도 있습니다.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1748~1832)이 쾌락을 과학적으로 수량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우리는 개인이 느끼는 쾌락과 고통을 수치로 환산해 도덕의 잣대로 삼을 수 있다고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공리주의는 모든 이익을 계산해서 판단하려는 원리입니다. 이는 ‘정통’ 경제학자들이 한계효용이라는 개념으로 인간 욕구를 수량화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쾌락과 고통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쾌락은 상대적이며, 다른 사람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럼에도 벤담은 쾌락 간 질적인 차이를 부정하며, “쾌락의 양이 같다면 압정도 시(詩)만큼 좋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했습니다. 공리주의를 문자 그대로 따를 경우 질적으로 높은 쾌락, 이른바 시 같은 고급문화의 가치는 사라집니다.
공리주의는 ‘시’와 같은 질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단지 선택의 만족을 극대화하자는 주장입니다. 특히 교육이나 건강, 범죄 처벌, 이민 정책, 환경 보호처럼 도덕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문제에 공리주의를 적용할 때, 모든 사람의 선호가 동일하다는 전제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사람마다 도덕적인 선호도가 다른데도, 이를 무시한 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