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화폐
화폐가 상품의 사용 가치를 교환 가치로 바꾸었다면, 과연 화폐는 인간의 교환 활동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요? 역사책은 흔히 그렇게 설명합니다. “기원전 3000년경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던 메소포타미아는 인도와 시리아에서 목재를, 아라비아에서 향신료를, 페르시아에서 금속과 석재를, 이집트에서 황금을 수입했다. 이렇게 다양한 물품이 교역되면서 화폐가 일찍부터 유통되었다.” 이런 설명은 마치 화폐가 활발한 교환 활동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생긴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오늘날 거리마다 교회가 많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교회 중심 사회가 아니듯, 옛날 어느 시대에 화폐가 존재했다고 해서 그 사회가 화폐 중심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화폐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큰 의미가 없으며, 설령 사용되었다 해도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역할에 그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화폐의 기원을 인류의 교환 성향에서 찾은 대표 학자가 애덤 스미스입니다. 그의 추론에 따르면,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분업으로 각자 만든 물품을 서로 직접 교환했습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내가 만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나,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을 찾는 일이 늘 쉬운 건 아니었습니다. 이 불편을 줄이고자 교환의 매개 수단이 고안되었습니다.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금이나 은처럼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교환 매개체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후 금과 은을 대신할 지폐가 발명되어, 통화 체계가 정교하게 발전했다고 스미스는 추정했습니다.
화폐는 정말 단순히 교환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이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했을까요? 지금도 우리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 같은 가까운 사이엔 돈거래를 삼가라고 말합니다. 가까운 사이에 돈이 오가면 원만한 인간관계를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화폐는 자연스럽지 않은 관계를 만듭니다. 가족이나 친구, 이웃처럼 친밀한 관계에선 화폐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관계가 화폐 확산과 발달을 막기 때문입니다.
서로 친밀하고 끈끈한 마을 같은 공동체에서 화폐 거래는 어떤 어색함을 불러옵니다. 화폐가 공동체에 스며들면 공동체 유대가 ‘화폐 관계’로 바뀌면서 갈등이 생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개인 간 거래에서 돈이 오가면 공동체에 큰 위협이 됩니다. 돈 많은 자가 사회 질서를 지배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화폐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화폐는 쉽게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많은 공동체에서 화폐가 발달하지 않은 건 그들이 미개해서가 아닙니다. 화폐가 존재하려면 불편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폴라니는 화폐를 단순한 교환 수단으로만 보면, 스미스처럼 그 기원을 잘못 유추하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폴라니는 화폐의 기능을 네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배상이나 공물, 선물, 종교 제물, 납세처럼 ‘책무를 결제’하는 기능입니다. 둘째는 자금을 관리하고자 단위로만 존재하는 ‘가격 척도’입니다. 셋째는 식량이나 가축, 보물 같은 ‘부(富)의 비축’입니다. 마지막 넷째가 스미스가 말한 ‘교환 수단’입니다.
화폐학자 필립 그리어슨(1910~2006)은 화폐의 기원을 첫 번째 기능인 ‘책무 결제’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신체 피해를 보상하는 인명금(人命金, blood money)을 화폐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탈리오 법칙(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동일한 손해만 가해자에게 요구해야 하며, 그 이상을 원하면 안 된다는 등가 법칙)처럼, 인류가 사건을 일관되게 처벌하거나 배상하려 할 때 화폐가 처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고병권(1971~ )은 “19세기 이전 민중은 화폐와 무관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생산수단을 빼앗기고 생존을 위해 시장에 오직 노동력을 팔아 얻은 화폐로 생활하는 사람에게만 화폐가 필요하다”며, “살기 위해 교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화폐가 생긴다는 스미스의 주장은 실제 화폐 역사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인류학자 캐롤라인 험프리(1943~ )도 고대 사회가 스미스의 상상처럼 작동한 증거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물물교환에서 화폐로 발전한 사례는 없으며, 모든 민족지학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고병권은 화폐가 교환 수단이 아니라 ‘책무 결재’ 기능, 특히 국가의 조세 징수를 위해 생겨났다고 보았습니다.
“화폐는 상인보다 국가의 필요에서 비롯됐고, 그 발행은 국가의 조세 징수와 맞물려 있다. 평민들은 세금을 화폐로 내야 했기에 시장에 나와 가진 걸 팔아 화폐를 구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화폐에 특권을 부여했다. 예컨대 로마 귀족들은 화폐를 유통시켜 평민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정해진 기한 내 화폐로 세금을 내야 했기에, 평민들은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에 나와 화폐를 구하려고 물건을 팔아야 했다.”
화폐는 우리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상업이 발달한 사회에서 통치자들은 세금을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걷기 위해 화폐를 도입했습니다. 사람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국가가 만든 화폐를 쓸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화폐는 사회 전반으로 퍼졌습니다. 화폐의 기원은 시장이 아니라 국가였으며, 자율적인 교환이 아닌 강제된 의무였습니다.
고대 로마와 달리, 천년 왕국 신라는 화폐가 없었습니다. 금속을 잘 다루고 수출까지 했지만, 신라는 금속 화폐를 만든 적이 없었습니다. 996년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금속 화폐 제작이 명령되기 전까지 한반도에서는 화폐를 만들려는 시도조차 없었습니다.
신라 인구 600만 명이 화폐 없이도 잘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은, 화폐가 단순히 교환의 불편을 해소하려는 수단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화폐는 생산수단을 잃고 노동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는 장치입니다. 통일신라시대 농민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쌀이나 대두, 콩, 호두, 잣, 마, 포 같은 현물로 세금을 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조선 후기까지도 화폐는 널리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쌀이나 포목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않은 곳, 바로 그곳이 신라와 조선이었습니다.
근대 초기 서양 국가들은 요새를 짓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현물 대신 현금으로 내는 과세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사람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기 위해 ‘돈을 벌도록’, 곧 노동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 유럽 국가들이 거둔 현금 세금은 거의 스무 배나 늘었습니다. 국가의 힘은 전체 과세액 중 실제 걷힌 세금의 비율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강한 국가는 80퍼센트를 걷고, 약한 국가는 20퍼센트에 그칩니다.
중국 송나라에서도 세금 징수를 위해 ‘송전’이라는 화폐가 대량 발행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물품이나 노역으로 세금을 냈지만, 화폐로 바뀌면서 징수가 쉬워지고 액수도 늘어났습니다. 지주와 정부가 상업 활동에 의존하게 되면서, 세금은 점차 현물이나 노동이 아닌 현금으로 부과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현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국가가 세금을 걷고자 화폐를 이용한 사례는 서구와 중국뿐 아니라 아프리카까지 이어집니다. 19세기 초,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개발에 현지 노동력이 필요했지만, 과거처럼 노예를 부릴 수 없었습니다. 이에 제국주의 행정관들은 교묘하게 속임수를 썼습니다. 아프리카인에게 세금을 현금으로 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시장에 팔 물건이 없던 대부분의 아프리카인은 세금을 내기 위해 유럽 고용주 밑에서 임금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럽인들은 원하는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존 콜리어 <레이디 고다이바>(1898)
고다이바(Godiva)는 11세기 영국 코번트리 지역의 백작 부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편 레오프릭 백작이 과도한 세금을 거두자, 그녀는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백작은 황당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녀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시장 거리를 지나가면 청을 들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농민을 아끼던 고다이바는 이를 받아들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시장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지나갈 때 창문을 커튼으로 가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