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

- 9장 사회과학

by 북다이제스터



경제학사를 시간 순으로 살펴보면, 세 가지 문제점을 짚을 수 있습니다. 먼저, (1)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는 경제학과 도덕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덕은 세상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다루지만, 경제학은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객관적인 학문이라는 이유에서 입니다. 하지만 과연 경제학을 도덕과 분리할 수 있을까요?


둘째, (2)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을 문명사나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문제와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치경제학을 “정치가가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는 시장이 스스로 완벽하게 작동하므로, 정치 개입은 오히려 시장을 왜곡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시장이 정치와 무관하게 작동할 수 있을까요?


끝으로, (3) 경제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회과학자는 우리가 인간 행동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으며, 적어도 법칙까진 아니더라도 그 영향력을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는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경제학은 정말 사회‘과학’이라 부를 만한 학문일까요?


먼저, (1) ‘경제학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은 경제학이 과학이 되려면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데만 집중해야 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작가 정희진(1967~ )은 가치중립을 주장하는 자체가 오히려 훨씬 더 강력한 가치판단을 전제로 한다고 지적합니다. 가치중립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균형은 없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저울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이 가장 무서운 서명인 것처럼,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누군가 자신 말이 ‘사실’이고 ‘객관적’이라 주장한다면, 그것은 대개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기 위한 상투적인 언사입니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해 준다는 주장 이면에는, 우리 모두가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실은 우리의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팩트풀니스(factfullness,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관점)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누군가의 가치관은 사회 쟁점이 무엇인지 정할 때뿐 아니라, 그 쟁점에 어떤 해결책을 쓸지 선택할 때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선택 뒤엔 종종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유리한 이해관계가 숨어 있습니다. 중립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부와 권력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건 현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자는 뜻입니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회에서 중립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순수한 사실’이나 ‘중립적인 서술’은 결국 은폐된 해석이며, 수많은 관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 세계는 무한히 복잡합니다. 현실을 묘사하려는 어떤 설명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충실한 진술이라 해도 현실의 모든 측면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모든 진술에는 언제나 무시되거나 왜곡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은 결국 현실의 한 단면만 택해 보여주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일입니다.


‘경제학이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 깊게 이해하려면, ‘외부효과’(externalities)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부효과란 개인이나 기업이 경제 활동을 하면서 사회에 피해를 끼치고도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 상품 제조비용이나 판매가격이 실제보다 낮게 책정되는 현상입니다. 결국 외부효과는 사회가 떠안는 숨은 비용입니다. 영리 기업의 이익은 종종 사회에 끼친 ‘피해’에 비례해 증가합니다.


가령 일본 도요타 자동차는 ‘JIT’(Just-In-Time) 생산 방식으로 한때 세계 시장을 제패했습니다. 자동차 공장은 일부 부품을 직접 만들지만, 대부분은 외부 하도급업체에서 조달합니다. 도요타가 부품을 직접 만들면 정규직 임금이나 부지 확보, 창고 관리비가 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요타는 부품을 ‘바로 필요한 순간에 맞춰’(JIT) 공급받도록 하도급업체들과 계약합니다.


부품 회사들은 제때 납품하기 위해 부품을 실은 트럭을 도로에 대기시키고, 도요타는 추가 비용 없이 원재료를 확보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 도로는 트럭으로 붐비고, 교통 혼잡과 대기오염이라는 ‘외부효과’가 발생합니다. 이 비용은 누가 떠안아야 할까요? 모든 생산은 사회 안에서 이뤄지기에 항상 외부효과를 낳습니다. 그럼에도 생산자는 이를 도덕적인 문제로 거의 고려하지 않습니다. 경제는 도덕과 분리돼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부효과를 줄이고자 오염 비용을 기업에 부과하는 정책은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일단 오염 비용만 내면, 오염물질을 마음껏 방출할 특권(가령, 탄소배출권)이 생깁니다. 기업은 비용을 지불하고 모든 책임에서 벗어난 것처럼 행동하며, 탄소배출권은 일종의 도덕적인 허가증이나 면죄부가 됩니다. 이로써 환경오염은 단순히 돈으로 환산되는 문제가 되고, 기업은 오히려 이를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습니다. 결국 특권이 된 탄소배출권은 자유 시장에서 기업이 공공의 불행을 자동으로, 그것도 가장 효율적으로 극대화는 수단으로 변질됩니다.


사람들은 탄소배출권을 비판하기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지속가능경영’, ‘ESG 경영’ 같은 이름 아래 그것을 바람직한 제도로 받아들입니다. 기껏해야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벌이는 ‘사다리 걷어차기’ 정도로 여길 뿐입니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세르주 라투슈(1940~ )는 『탈성장사회』(2010)에서 ‘지속가능경영’이란 말 자체가 사실상 “오염 물질을 더 오래, 천천히 배출하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환상 뒤에 자본 이익을 숨기고, 희생자들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진정한 사고(思考)의 독(毒)이자, 대단한 모순어법”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속가능경영’처럼 그럴듯하지만 모순된 말을 한 데 묶어 쓰는 표현은 자본의 이익을 감추고 비판을 무디게 하려는 전략입니다. 기업은 ‘녹색혁명’을 말하지만, 생태학 관점에서 보면 ‘녹색’인 생산은 없습니다. ‘무해한 방사성 폐기물’이나 ‘에코 건설’, ‘공정 무역 커피’ 같은 윤리 마케팅 역시 우리의 판단을 흐리는 수사에 불과합니다. 그저 짧은 카피(copy) 한 줄로 자본주의가 마치 윤리적일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뿐입니다.


한때 비논리적이라 비판받던 이런 모순된 표현들은 이제 착취와 환경 파괴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사회 언어가 되었습니다. 논리는 사라지고 감성에 기대며, 모순은 진실처럼 포장됩니다. 이를 듣는 사람들은 가식에 익숙해지고 인식이 흐려지며, 제한된 의미만 반복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탄소배출권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면 그 권한의 ‘기반’까지 함께 넘겨야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산업 발전이라는 명목에 부수적인 환경오염을 감내하지만, 그럴 수 있는 오염의 수준과 정당성은 산업마다 다릅니다. 예컨대 생명을 살리는 의약품 생산에서 발생하는 오염은 어쩔 수 없이 참을 수 있습니다. 반면 카지노 회사가 흘려보내는 오염은 감내할 이유가 없습니다. 카지노가 의약품 회사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해서,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할 권리까지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1953~ )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2012)에서, “정부가 대기에 과도한 오염물질을 뿜어대는 기업을 위해 탄소배출권 거래 제도를 도입할 게 아니라, 이들에게 도덕적인 오명을 씌우고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탄소배출권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들면, 거기에 마땅히 수반되어야 할 부도덕한 이미지는 사라집니다. 간디(1869~1948) 역시 경제법칙과 도덕법칙은 하나라 보며, 사회를 병들게 하는 일곱 가지 사회 악(惡) 중 하나로 ‘도덕 없는 상업’을 꼽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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