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사회과학
현실의 시장에서 개인 간 권력은 동등하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은 자원 배분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일부는 이해집단을 만들어 적극 개입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 토지나 화폐, 노동 같은 주요 경제 자원은 권력에 따라 배분됩니다. 자원 배분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을 배제한 순수한 자원 배분은 불가능합니다. 경제에 정치와 권력이 없는 상황을 가정하거나 기대하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에 불과합니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방임 시장을 일부 인정하더라도, ‘경제법칙’은 생산 영역에만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의 영향을 받는 생산은 필연의 법칙에 지배될 수 있지만, 분배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분배는 필연이나 사실의 차원[경제]이 아니라, 당위나 가치 차원[도덕이나 정치]에 속합니다. 생산과 분배 사이에는 굵은 단절선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스 금언이 말하듯, 중요한 건 ‘주어진 것을 선용(善用)하는 것’, 즉 우리 삶에 주어진 것을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에 있습니다.
밀이 말한 공정한 분배를 실현하려면, 사람들이 따라야 할 분배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기준은 자연법칙처럼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정답은 없으며, 그 정당성은 정치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사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기준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필요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공정한 분배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묻혀 있음’(embeddedness)이라는 개념을 항상 자신 경제학 논리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자율적인 체제가 아니라, 항상 사회 속에 ‘묻혀’ 있습니다. 이는 자유방임주가 말하는 자율적인 시장 개념과는 거리가 멉니다. 시장은 사회보다 우위에 있지 않으며,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배분할지는 사회가 결정해야 합니다. 시장은 이 결정에 따라 움직여야 하며, 단순히 이윤만 쫒는 시장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통’ 경제학은 오히려 사회를 시장 논리에 종속시키려 합니다.
시장 자유방임주의를 지지하는 ‘정통’ 경제학자들은 흔히 사회주의 ‘계획 경제’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요구하기에 불가능하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 비판은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정통’ 경제학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들 또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없으며, 시장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계획경제와 자유방임 시장이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두 체제가 모두 성공하려면 완벽한 데이터가 필요하지만, 케인스는 이를 불가능한 일로 여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 이론은, 현실이 그 이론과 닮아 있다면 이론의 결과도 현실에 가까울 거란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자 켈빈 랭카스터(1924~99)와 리처드 립시(1928~ )는 이 전제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며, ‘차선’(次善)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차선 이론은 ‘차선’인 시장, 즉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에 ‘거의 근접한’ 시장이라 해도, 오히려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좋은 시장, 심지어 전혀 경쟁적이지 않은 시장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경제학과 신입생들이 수요-공급 그래프와 미적분 기초를 간신히 배우고 난 후, 경제학이 현실과 다르다는 좌절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순간은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 개념을 배울 때입니다. 하지만 경제학 교과서는 이 반감을 예상이라도 하듯,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현실 분석의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정통’ 경제학자들은 이 모델이 단순하고 추상적이지만, 정책 수립과 예측에 매우 유용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이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이상적인 준거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성적이고 필요한 정보를 모두 갖고 있으며, 시장 참여 기회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자유방임 이론의 모든 가정을 받아들입니다. 또한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되고, 시장은 완전경쟁 조건을 정확히 반영한다는 가정도 수용합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시장을 이처럼 ‘가능한 한’ 경쟁적으로 만들면, 그 결과가 이상(理想)에 가까워질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 점이 바로 랭카스터와 립시가 밝혀낸 오류입니다. 현실이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의 이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최선은커녕 오히려 다른 차선책보다 훨씬 나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완전경쟁 조건을 더 많이 충족시킨다고 해도, 모든 요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오히려 완전 효율이라는 이상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특히 공해나 소음, 악취 같은 부정적인 외부효과가 발생할 경우, 그 비용은 재화 가격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생산자가 생산에 드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부효과 비용은 국민이 세금으로 떠안게 됩니다. 자유방임주의 수호자들은 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일부 비용이 누락되더라도, 다른 부문이 경쟁적으로 운영되면 전체적으로는 올바른 가격 수준에 근접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일부 가격이 왜곡되면, 나머지가 아무리 정확해도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습니다.
차선이론의 핵심은,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 모델이 현실에서 유용한 정책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런 단순한 도구는 현실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알려주지 못합니다. 립시는 차선이론이 ‘정통’ 경제학자들을 “겸손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극도로 이상화된 모형만으로는 시장 효율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시장이 언제나 공정하고 효율적이며, 용인할 만한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승자 독식의 불평등 세계에서 빈부 격차는 계속 벌어지는데, 모든 사회적인 결과를 시장에만 맡긴다면, 그 격차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한 사회의 경제 체제는 정치 이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념 싸움은 그만, 이제는 경제’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정치 이념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