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사회과학
끝으로, (3) 경제학은 과연 사회‘과학’일까요? 사람들은 흔히 경제법칙이 경제학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경제학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은 그 법칙을 발견하는 학문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679)는 당시 자연과학의 발전을 인문학에 접목해, 이른바 ‘사회과학’을 창시하려 했습니다. 그는 이성적인 과학 방법론으로 비이성적인 사회를 설명하고, 자연의 관성 원리처럼 사회에서도 기본 원리가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갈릴레오가 운동 법칙을 이해한 것처럼, 홉스는 논리와 이성으로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자명한 공리에서 출발해, 정치나 사회의 과학을 정립하려 했습니다.
홉스와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1864~1920)는 사회과학을 “사회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과학”이라고 정의하며, “행위의 규칙을 발견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핵심 과제”라고 믿었습니다. 즉, 사회과학의 목표는 사회현상을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경제학자를 비롯한 사회과학자들은 인간의 사회 행위를 설명하고자 종속변수와 독립변수를 구분하고, 독립변수를 어떻게 분리할지 고민합니다. 이는 사회과학이 환원주의 관점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환원주의란 현실을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分析)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전체는 단순한 부분의 합이 아닐 수 있지만, 미시 단위의 고유 성질이 거시적인 결과를 만든다고 가정하며, 모든 사건에는 예측할 수 있는 결정론적인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시적인 특성이 거시 수준에서는 사라지거나, 심지어 반전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분석의 핵심은 대상을 실체화하는 데 있습니다. 실체화란 대상을 배경이나 맥락에서 분리해 오직 대상 그 자체만을 독립적으로 관찰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단 이해는 쉬워집니다. 마치 대상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착각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상을 실체화하면 배경과 맥락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전체’는 사라지고, 부분만 잡다하게 늘어놓는 꼴이 됩니다.
그럼에도 사회과학자들은 환원주의가 과거와 현재를 일반화해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습니다. 그렇지만 미래는 과거에 비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미래는 현재라는 특이점(singularity) 너머에 있으며, 우리가 확실히 아는 건 과거의 연속성이 미래에도 어느 정도 이어질 것이라는 점과, 그 과정에 우연성이 개입되리라는 사실 뿐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성이 너무 강해 우연의 영향이 거의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 자체가 감정이나 욕망 같은 우연에 쉽게 흔들리기에,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1918~88)은 “전자(電子)에 감정이 있다면 물리학이 얼마나 더 어려웠을지 상상해 보라”고 했습니다. 사회과학은 이 문제를 종종 외면해 왔습니다. 인간 행위는 예측할 수 없으며, 사회과학에서 주장하는 법칙은 결국 추정에 불과합니다.
‘표준화된 사회과학 모델’은 인간 행동의 복잡성을 무시한 채, 한두 가지 기본 원인만으로 모든 현상을 간단히 설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집단에 속한 인간 행동이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외면합니다. 또한 사회과학은 보편적인 이론을 세우려는 욕심에, 문화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과 욕망, 문화, 신념에 따라 예측 불가능하게 행동합니다. 동일한 조건에서도 서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이 때문에 사회현상은 반복 관찰만으로 확실한 법칙을 도출하기 어렵고, 자연과학처럼 실험으로 검증하기도 힘듭니다.
결국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이 안고 있는 핵심 문제는 결정론을 강조하는 ‘과학’이 되려 한다는 점입니다. 어느 인도의 ‘정통’ 경제학자는 강의에서 “훌륭하고 고결한 경제학자는 물리학자로 다시 태어나지만, 악덕하고 부도덕한 경제학자는 사회학자로 태어난다”고 말하며, 왜곡된 윤회론으로 사회학을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일부 학자는 사회학을 과학처럼 만들고자 수치화할 수 있는 도구만 사용해 현상을 계량화하며, 공식과 그래프로 사회학 영역을 축소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인간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묘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강의실 밖에서는, 이런 접근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인간 삶에서 더 중요한 건 좋은 관계나 삶의 만족감, 희열, 광기 같은 측정하기 어려운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바로 이런 것들이야말로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진짜 동력입니다.
과학기술사회학자 데이비드 블루어(1942~ )는 사회‘과학’이 기존의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통념에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사회과학이 방법론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찾아낸다는 생각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블루어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사실’(fact)의 어원이 ‘만들다’라는 뜻의 라틴어 ‘파케레’(facere)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습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 특정 맥락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구성물에 불과합니다.
‘사실’이라는 개념은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 이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불과 500년 전입니다. 16세기까지 확증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나 진리는 오직 신의 마음속에만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이 값이 싸지고, 안경이 발명되면서 더 많은 사람이 글을 읽고 쓰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책 읽는 시간이 늘고, 수요도 증가했습니다. 그러자 인쇄된 글이 곧 ‘사실’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말보다 글을 더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신문이나 교과서, 법전처럼 인쇄된 건 자연스럽게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사실에 기반한 진리는 그것이 착각임을 망각하게 된 착각’이란 말처럼, 사실은 만들어집니다. 철학자들의 표현대로 사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세상에 확실한 건 없고 결국 모든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로 귀결됩니다. 사회과학자들 역시 여러 전문가 집단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들 역시 특별히 큰 힘을 가진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사회과학이 행사하는 과도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회학자 미셸 칼롱(1945~ )은 우리가 믿는 경제학이 곧 우리의 세계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경제 체제는 현 경제학이 만들어 낸 ‘사실’, 즉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경제학 담론이 구성한 결과물입니다.
세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 질서 있게 보이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실제’ 세상입니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는 현상계이고, 후자는 물자체입니다. 현상계는 우리가 만든 규칙에 따라 일정한 질서가 있지만, 물자체인 ‘실제’ 세계의 질서(그런 게 정말로 있다면)는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습니다.
경제학이 때때로 세상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현실의 경제 질서 자체가 우리가 만든 경제학의 규칙에 따라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은 단순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경제학이 오히려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경제학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경제학은 가난한 자를 해방시키지만, 어떤 경제학은 노동 착취의 도구로 쓰이기도 합니다. 경제학 이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현재 상황에만 초점을 맞춘 경제학은 결국 기존 사회 질서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그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