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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수 Aug 05. 2020

날씨가 너무 좋아요-황주리 에세이

-보헤미안의 책방

출처 : 책 삽입 그림-황주리의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1998-2000


황주리 작가의 「날씨가 너무 좋아요」는 아주 오래전 읽은 책인데,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 다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제목이 마음을 끌었고 내가 좋아하는 화가 황주리의 그림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구입했던 것 같다. 약 20년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예술가들이 안고 있는 고독과 외로움을 즐기면서도 사람을 좋아하는 따뜻한 마음이 글 속에 잘 스며들어 있다.  


「‘창문을 닫아주세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나는 이 말의 느낌을 너무도 잘 알 것 같다. 사람이 죽으면서 놓아두고 떠나기 가장 아쉬운 것은 돈도 집도 자동차도 아닌 창 밖의 풍경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살아 있는 동안 그 풍경들을 원 없이 바라보는 여행의 축제를 꿈꾼다.」 p.19~20      

르 푸아트벵이라는 사람이 임종 때 했다는 ‘창문을 닫아주세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라는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 햇살이 찬란하고 좋은 날씨라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임종을 앞두고 창문을 닫아 달라는 말이 눈물이 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살아있는 동안 풍경들을 원 없이 바라보는 여행의 축제를 꿈꾼다는 작가의 말이 나의 생각이랑 많이 닮은 것 같다.


가족 중 특히 아버지와의 추억을 많이 떠올리는 작가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맛난 음식 앞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곤 한다.     

「그 믿음직하던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져 꿈속에 밖에는 만날 수가 없다. ‘옜다’하며 담배 한 갑을 내 방에 던져주시는 아버지. 그러나 비록 꿈이 아니더라도 나는 여기저기서 당신을 만난다. 맨해튼의 모든 길목에서, 트럼프 타워 앞에서, 그 옛날 당신의 별명이던 마천루,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에서......」 p.37~38      

라는 글에서는 왜 작가가 아버지를 그토록 그리워하는지 알 것 같다. 그림 그리는 딸의 무거운 어깨와 가시밭길 같은 작품의 세계를 아버지는 말없이 응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대학진로를 앞두고 고민하던 딸에게 가고 싶은 과를 자유롭게 가라고 격려해 주시던 나의 아버지가 문득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딸들의 행복 앞에 무방비 상태인 것 같다.


생선을 좋아하는 작가는 맛있게 생선을 먹다가도 생선의 눈동자와 마주치면 섬뜩해질 때가 있다고 했다. 죽은 생선의 눈에도 표정이 있다는 표현은 일상을 관찰하는 화가의 눈이 빛나는 순간이다.

미국으로 떠날 때마다 굴비 몇 마리를 짐 속에 넣어 주시는 어머니 덕분에 특별히 기분이 좋거나 나쁠 때 야금야금 아껴 먹는다는 글을 읽다가  ‘나도 다음에 딸이 출국할 때 가방에 굴비 몇 마리 포장해서 넣어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 해외에서 살다 보면 어릴 적 먹던 음식이 그리워지는 건 당연하고 특히 일이 잘 안 풀려 서러운 날엔 그리운 음식으로 인해서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작가인 화가 황주리는 뉴욕의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영화를 보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책 속에 언급된 영화 중에서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작품들을 메모해 두고, 시간 날 때마다 한 편식 꺼내 보고 싶다.

스무 살짜리 청년 헤롤드와 여든 살을 2년 앞둔 할머니 모드와의 나이를 초월한 사랑 「헤롤드와 모드」「맨해튼의 선신」「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다큐멘터리 영화 「앙고라」등이 나의 보고 싶은 영화 목록표에 추가되었다.


뉴욕에서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안에 있는 책방이다. 책방의 2층 카페에 앉아 창 밖을 보면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 한복판에 무덤이 1백여 개 남짓한 작은 묘지가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사람들은 카페에 앉아 점심을 먹기도 하고,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 눈을 돌려 평화로운 풍경에 행복함을 느끼기도 한다니 다음 뉴욕을 방문할 때는 꼭 책방에 들러 책도 사고 작가가 느낀 감정도 공유해 보고 싶다.

작가는 고독이라는 글에서 사라져 가는 고독의 심성을 안타까워했다.     

「오늘의 나는 혼자 있을 때조차 그 싱싱한 고독을 느끼지 못한다.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극장에서, 비행기 안에서, 낯선 기차역에서조차 나는 더 이상 고독할 줄 모른다. 아, 찬란했던 진주알처럼 품은 눈물을 다 어디에 두고 왔을까? 우리는 너무 많이 실망하였고,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p.149      


이 글을 읽으며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았다. 나조차도 예전의 예민하고 상처 받고 아픈 습작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살면서 그 싱싱한 고독의 시간이  너무나 그리운 적이 있어 불면의 밤을 지새울 때가 아직은 가끔씩 있다.


작가는 죽음에 대해서 유독 생각이 많았다.

이별의 순간에는 편지 따위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별은 정전처럼 갑자기 오는 것이며, 의성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뚝’ 끊어지는 소리라고 했다.

여행을 하면서도 죽음을 생각한다는 화가는 바르샤바에서 카토비체를 경유해 아우츠비츠로 가는 열차를 탔다고 회상했다. 지구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불행했던 장소로 기록되는 아우츠비츠에서 안타까운 수많은 죽음을 돌아보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에서 버스로 한 시간 떨어진 테레진 수용소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보았다고 했다. 열두 살에 가스실에서 죽은 소녀의 그림은 작가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슬픈 유서로 기억에 저장되었다.

이 글을 읽으며 안네의 일기를 읽고 온몸을 떨며 눈물 짓던 일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아우츠비츠 관련 내용의 영화를 보면서 꿈에서 가위 눌리던 나의 소녀 시절 기억의 단편들이 되살아났다.


종말론에 빠져 휴거를 꿈꾸고 지구 곳곳에서 망해가는 소리가 들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분, 매초, 새로운 생명이 눈부시게 태어나고 있다고 화가인 작가는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야 할까? 그렇다. 내 그림을 사랑할 후세의 어느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하리라. 내 무덤 위에 해바라기 한 송이 꽂아달라.」  p.95    

  

예전에 화가 황주리 개인전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사랑받는 화가임을 실감했었다.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무덤을 장식하겠지만 아직은 유서나 무덤 이야기는 미루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성실하면서 생을 치열하게 살고, 생의 장면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 켜는 화가의 진솔한 모습들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날씨가 너무 좋아요」는 오래전에 출판되었지만, 읽을수록 감미롭고 읽을수록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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