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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수 Dec 28. 2020

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1

-가난한 갈대의 사랑노래~기다리다 죽어도, 죽어도 기다리는

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가난한 갈대의 사랑노래~기다리다 죽어도, 죽어도 기다리는 )     


이 책을 참 아껴 읽었다. 오래도록 읽었다.

시가 점점 잊혀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는 요즘, 정재찬 교수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귀한 선물 같았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젊은 제자들을 위해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그들과 함께 글들을 나눠왔다”라고 했다.

“시를 잊은 젊은이, 시를 사랑하는 법을 아예 배워 보지도 못한 젊은이, 그리하여 시를 읽고 즐길 권리마저 빼앗긴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게 안타까워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저자의 다음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시에 대해 강고한 장벽을 치고 살아온 그들의 틈을 뚫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인스턴트에 길들여진 그들에게 시의 깊은 맛을 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레시피가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레시피!'


시대가 바뀌어가고 있는데 시를 읽지 않는다고, 종이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방법을 바꾼 시도는 혁신적인 것 같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가요와 가곡, 그림과 사진, 영화와 광고 등 다양한 재료와 스토리에 시를 버무린 일종의 퓨전 음식”

이렇게 시를 강의한다면,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오는 것처럼 시를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고, 시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정재찬 교수는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시를 강의한다.

나도 좋아하는 시를 읽고 느끼다 보면, 자연스레 그림과 사진이 떠오르고, 노래도 흥얼거려지고, 한 편의 영화가, 광고가 연상되어 떠오르곤 한다.  

    

「가난한 갈대의 사랑노래」부터 나의 가슴은 뛰었다.

작가의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오시면 그 당시 인기 가수였던 박일남의 <갈대의 순정>을 즐겨 부르셨다고 했는데, 나도 어릴 때 아버지가 술 한 잔 드시고 이 노래를 부르던 장면을 자주 보았었다.

정재찬 교수처럼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았고, 신경림의 시 <갈대>를 외우며 대학 시절을 보냈었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별이 빛나던 밤에」에서는 루카치, <소설의 이론>과 방정환의 <형제별> <어린 왕자>, 알퐁스 도데의 <별>, 김광섭의 시 <저녁에> 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퓨전 형식의 집대성이다.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나 대중문화에 박식한 걸까?

윤형주가 부른 < 두 개의 작은 별>과 윤형주의 육촌지간인 민족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거기에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유명한 음료 광고까지 끝없이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넋 놓고 앉아 있어야 할 지경이다.

그 당시 오란○ 음료는 광고 모델 덕분에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상큼한 CM송과 아름다운 모델이 마시던 음료 광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 <라디오스타>와 이성선의 <사랑하는 별 하나> 고흐의 세계적인 명화 <별이 빛나는 밤>에, 돈 매클레인의 명곡 <빈센트>까지 별 여행은 멈출 줄을 모른다.

저자는 혹시 우리는 외롭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외로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외롭게 살아, 그만 하늘의 별조차 잊은 것은 아닐까? 묻고 있다.    

 

「떠나는 것에 대하여」에서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와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다루고 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낙화>는 사람들이 참 많이 읽고 좋아하던 시였고, 패러디도 많이 되던 인기 있던 시였다. 우리가 젊은 날엔 이별하는 연인들은 <낙화>를 인용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뚝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일 오랜 병상의 세월을 보내는 노인이 있다면 존중하라. 그 모습을 결코 추하다 하지 마라.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요양 병원에서 오래 견디시고 있는 모든 어르신들과, 가족들에게 따뜻한 위안이 되는 말이다.     


「눈물은 왜 짠가」에서는 함민복의 시 <눈물은 왜 짠가>,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와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가  소개되고 있다.

한 때 우리는 이 두 시인의 가슴 울리는 시를 읽으며 가난과 슬픔을 생각했었다.

저자는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다”라고 말하며,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 <다시>와 정호승의 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돼라>를 인용한다.

안치환이 곡을 붙인 정지원 시인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얘기하면서 독자들에게 원시를 감상하고 힘차게 노래해 보라고 말한다.

“누가 뭐래도 믿고 기다려주며 / 마지막까지 남아 / 다순 화음으로 어울리는 사람은 찾으리 / 무수한 가락이 흐르며 만든 / 노래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뜻을”    

 

「그대 등 뒤의 사랑」에서는 영화 세편 <기쁜 우리 젊은 날>, <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와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의 연관성을 설명한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로 시작하는 시 구절을 들으면 왠지 지금도 가슴이 뛴다.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이며 고3 때 사랑하던 한 살 연상의 여대생에게 바친 시로 고등학교 졸업 때 교지에 실렸다는 <즐거운 편지>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애송시가 되고 있다.

등 뒤의 수평선에서는 박목월의 <배경>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서는 강은교 시인의 <사랑법>을 소개하고 있다.     


「기다리다 죽어도, 죽어도 기다리는」에서는 “소망이 있는 한, 기다린다는 것은 정녕 행복한 일이다.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과 피천득의 <기다림>, 이흥렬 작곡의 <섬집 아기>,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을 소개한다.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인간은 살아가고, 때로는 희망이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어도 기다리다’에서 서정주의 <신부>를 소개하는데, 이 작품은 “일월산 황씨 부인당 설화”와 관련이 있으며, 살짝 변형된 판본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서정주의 시보다 조지훈의 <석문>이 일월산 황씨 부인당 설화에 더 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전에 서정주의 <신부>를 읽고 죽어서도 오해를 풀기 위해 긴 세월을 기다린 여인의 한 서린 기다림이 안타깝기만 했었다.


“첫날밤, 신랑이 오줌이 급해 달려가다가 문 돌쩌귀에 옷자락이 끼였는데 신랑은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고 잡아 다닌다고 생각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난 뒤에 신부네 집 옆을 지나다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고스란히 앉아 있어 안쓰러운 생각에 어깨를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는...”

    

‘죽다’에서 김민부 작사 장일남 작곡의 <기다리는 마음>을 인용하면서 작사를 한 김민부에 대해 소개한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신춘문예에 당선한 촉망받던 시인이었으나 방송작가로 입신하게 된다.

그는 당대 최고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본을 썼고, 부산 지역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인 <자갈치 아지매>를 만든 최초의 프로듀서였다고 한다. 창작 오페라 <원효대사>의 대본을 맡기도 했으나, 서른한 살 화마가 그를 삼켜 불꽃처럼 살다가, 불꽃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시인으로서의 김민부, 그가 가장 기다리는 순간은 목숨처럼 시를 쓸 날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고 정재찬 교수는 말하고 있다.

김민부의 시 <서시>를 읽다 보니, 오롯이 시를 쓰는 날을 기다리다 요절한 젊은 시인의 삶이 안타깝기만 했다.      

기다림이란 오늘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어제와 늘 같이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변화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이미 지나간 버스를 기다리는 것일 테다. 안타까워도 그것이 진실인데, 무서운 것은 과연 그 버스가 지나갔는지 여부를 알 길이 없다는 데 있다. 기다림에 녹이 슨 채, 그러다 우리는 죽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가끔 인생은 두렵다.  p.153

※ 한 권의 책으로 이렇게 좋은 시를 많이 만나기도 드문 것 같다.

시 한 편에 시대적 상황과, 영화와, 노래와, 광고가 어우러져 독자를 오래도록 시의 풍경 속에 머물게 한다.     

※「노래를 잊은 사람들」부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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