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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수 Oct 22. 2020

곽재구 사평역에서

-오늘의 시

커버 이미지 : 창비시선,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


곽재구 시인의 작품을 좋아한다.

특히 「포구 기행」은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 하는 지인들에게 선물로 전해 주었다.

여행길에서의 풍경들을 따뜻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정서가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포구 기행」은 다음에 보헤미안의 책방에서 다룰 예정임.)

곽재구 시인의 작품에서는 사람 냄새와 온기가 느껴진다.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잔잔한 행복감이 기분 좋게 다가선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감성에는 나이가 없다.

곽재구 시인이 오래전에 발표한 작품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다.

톱밥 난로, 대합실,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 그믐... 이런 단어가 낯선 세대들도 이 시를 대하면 이름 모를 그리움이 울컥 올라오지 않을까?


이 시를 읽다 보면, 낡고 오래된 역의 대합실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가 생각나고, 누군가의 오래 앓은 기침 소리, 그리고 침묵하는 분위기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 시는 간이역 대합실의 풍경을 통해 고단한 삶을 사는 서민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어둡고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서민들의 애환과 연민을 시인의 따뜻한 시선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사평역에서’는 내게 축복이자 감옥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2012년 『와온 바다』까지 시집을 여섯 권이나 더 냈지만 사람들은 오로지 ‘사평역에서’ 만을 기억하더라는 것이다.
특히 2013년 출간한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에는 ‘사평역에서’에 대한 글을 한 꼭지 실었다.
사평역의 실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숱하게 시달린 탓이다.
글에 따르면 사평역은 실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사라진 남광주역이 모델이다. 시의 화자가 눈물을 던져 주었던 톱밥 난로는 남광주역에 없었다.
 군 생활을 했던 전남 장흥 회진포구의 한 다방에 있던 톱밥 난로에서 착안했다.
 ‘사평’이라는 지명은 전국에 여러 곳이다. 완행버스 안에서 만난 눈빛 맑은 아가씨의 고향 마을 이름이 사평이라는 데서 따왔다.
“시인은 ‘사평역에서’를 울면서 썼다”고 했다.
 운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고통·절망·궁핍·그리움 같은 것들을 절절하게 느끼는 것이다.
 “시인이 눈물 100방울을 흘리며 절실하게 시를 써야 독자들은 눈물 한두 방울 흘릴까 말까”라고 했다.

  [출처: 중앙일보]   [요즘 뭐하세요] 중앙일보  2015. 4.7 인터뷰 내용


사평역은 시인이 지어낸 역이다. 실재에는 없지만 우리들의 마음속 어딘가에 그리움으로 존재하는 역.

역은 특히 간이역은 많은 감성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작은 역에 코스모스나 이름 없는 이쁜 꽃들이 피어있고, 친절한 역무원이 있던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린 장소......     

   

곽재구 시인이 「사평역에서」를 발표하고 얼마 후, 임철우의 단편 소설 「사평역」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에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라는 시가 일부분 인용되어 있다고 한다. 소설가 임철우가 곽재구의 시를 읽고 자신만의 영감을 떠올려 소설을 썼을까?

아주 오래전 「TV문학관」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문학성 있는 작품을 한 편의 영화처럼 만들어서 인기가 많았다.

대학시절 임철우 원작, 곽재구 작시의 「사평역」을 본 기억이 남아 있는데, 내용은 희미하지만 추운 겨울밤의 이미지는 생생하게 기억난다.   

  

자정 넘으면 / 낯섦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오지 않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밤 열차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지며, 따뜻한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추억의 ‘사평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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