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왠지 그를 생각하면 슬픔이 밀려온다.
요절한 젊은 시인.
눈부시게 젊은 날에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글, 마음껏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
1960년 출생, 84년에 중앙일보사 입사,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안개」 당선, 89년 타계
그를 말해주는 간단한 약력이다.
세월은 흘러 기형도라는 이름은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그 언젠가 서점에서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나에게는 책 제목을 음미하고, 책 내용을 상상한 뒤, 첫 장을 여는 습관이 있다.
요즈음에는 책 표지와 사이즈, 활자와 일러스트도 나의 책 구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처음 책과 만나는 순간, 시집 제목부터가 장엄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무엇을 의미할까?’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영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중략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 시 부분 발췌
나와 동시대에 태어나고 살았던 시인 기형도.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 나는 햇병아리 교사로 아이들에게 모든 정열을 쏟아붓고 있을 때였다. 그가 어두운 심야 극장에서 조용히 숨을 거둘 때, 나는 20대의 젊음을 마음껏 불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프다.
무엇이 기자로서, 시인으로서 막 성장하려는 사람의 꿈을 빼앗아간 것일까?
예술혼을 불태우지 못하고 요절한 예술가에게 관심이 많은 나는, 그들의 안타까운 삶을 시나 글로 써서 알리고 싶은 열망이 있다. 어떤 이유로든 떠나간 그들에게 아직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황해도에서 피난한 그의 아버지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서해안 간척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고 경기도 시흥으로 이주한다. 농사를 지으면서 안정을 되찾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지게 된다. 「엄마 걱정」이라는 시는 어린 날 시인의 고단했던 삶의 단편을 보여준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엄마 걱정」 부분 발췌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에서는 오랜 세월이 흐른 미래로 가서, 젊은 날 머뭇거리고 탄식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희망의 내용이 질투뿐이었던 자신의 삶을 쓸쓸하게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는 부조리한 시대 상황이, 죽음이, 허무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침묵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시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나쁘게 말하다」「대학 시절」「오후 4시의 희망」「장밋빛 인생」「여행자」등 기형도의 많은 시는 아프면서 아름답다.
그의 가장 좋은 선배 중의 하나였던 김훈은 “나는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 극장-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과연 그가 선택한 것일까. 차라리 운명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 인용자) 죽음의 장소는 나를 늘 진저리 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입 속의 검은 잎」 김 현의 해설 발췌
기형도 시인은 새벽 3시 30분경 극장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그의 아버지처럼 뇌졸중. 그러나 아무도 그가 왜 심야 극장에 홀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죽기 전날 저녁 그는 신문사에서 나와 혼자 인사동에 들른다. 그의 가방 속에는 시작 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인도에서 온 여성 작가 K의 편지, 몇 권의 책, 소화제 같은 소지품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인사동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맥주를 좀 마신다. 가방에서 K의 편지를 꺼내 몇 번 되풀이해 읽는 그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다. 바로 1년 전의 여행에서 그는 견훤이 창건했다는 전주 서고사에 머물고 있던 K를 찾아가 여러 얘기를 나눈다. 서고사에서 하룻밤 묵은 뒤 광주로 떠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터미널까지 따라 나온 K에게 그는 “내가 내 생에 얼마나 불성실했던가, 생을 방기했고, 그 방기를 즐겼던가를 서고사 일박을 통해 깨달았다.”라고 털어놓는다. 그는 맥주 한 병을 비운 뒤 인사동 길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간다.
출처 : 장석주의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들은 조용히 홀로 빛나고 있다.
이제는 빛바래고 작은 활자의 오래된 시집이지만, 나는 책장에 꽂힌 시집을 종종 만나러 간다.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그가 죽은 뒤에 나왔다. 그는 시집 출간을 염두에 두고 원고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시집 발간을 보지 못했다.
시대의 아픔을, 고된 젊음의 무게를 뒤로하고 그는 떠났다.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을 때, 먼 곳에서나마 그가 행복했길 빌어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