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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et Nov 01. 2020

네가 닳아가는 동안에

닳음을 사랑하는 법

사랑이 눈에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꽃이 피고 시들고 지는 과정을 통해 계절의 흐름을 눈으로 포착할 수 있듯이 시간의 흐름에 투영되는 사랑의 잔상들을 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함께한 시간만큼 나를 향해 기울어버린 연약한 기울기, 나의 날에 닳아간 그 뭉툭한 단면을 사랑한다. 철없고 미숙했던 나의 미성년의 계절 속에서 함께 머무르며 서서히‘나’로 닳아간  사람을 사랑한다.  


나에게 있어 사랑은 언제나 삶이 진행되는 속도보다 빨라야 하는 것이었고, 너에게 있어 사랑은  삶의 속도보다 느리게 흘러가야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렇게우리는 서로 다른 궤도에서 나는 음력을 축 삼고 너는 양력을 축 삼아 뒤틀린 모양으로 사랑 주위를 공전했다. 내가 멜로에 울면 너는 코미디에 웃었다. 내가 시를 읽으면 너는 스포츠 경기를 틀었다. 나는 너의 가슴을 찾으면 눈물이 터졌고 너는 나의 등을 찾아야 비로소 무너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있어 너를 사랑하는 일은 너를 바라보는것 이였는데, 너에게 있어 나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나눠 갖는 일이었다. 대체적으로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고, 너는 함께 하는 매순간이 사랑이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우주였다. 사랑이 구축해놓은 구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동안 우리는 양립할 수 없는 서로의 다름에 대해 애써 침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권태의 온도에 흘러 내리는 우리의 이질을 바라보며 인내가 조급하게 필요해지는 나날들이 생겨났다. 하루하루 맞지 않는 신발에 나의 일상을 구겨 넣으며, 너를 마주한 나의 생은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오도록 술을 마신 어느 날, 신촌역의 승강장에서 내선순환 열차와 엇갈리는 나의 마지막 열차를 놓치며 전화를 받지 못할 너에게 나의 막막함을 걸었다.


그거 알아, 합정 역으로 가는 열차 랑 이대 역으로 가는 열차는 평생을 서로를 그리는데 소진하는데도 서로를 만날 수가 없어. 서로 영원히 평행선에 있어야하거든. 사실 애초에 둘은 만나면 안돼. 저 둘이 만나면 사람들이 다치니까. 그렇게 만날 수 없고, 만나서 안되는 서로를 어쩌다 한번저런 식으로 서로가 스쳐 지나가는 그 찰나, 잔상만을 흘깃 엿보기 위해 서울 곳곳을 기웃거리는 거, 그게 그들의 최선인 거야. 저렇게나 짧고 허무한 최선이라니. 그리움에 바쳐진 여생이라니,  너무 슬프다. 꼭 너랑 나 같아.


어쩌면 우리는 저 열차들처럼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도 안되는 그런 사이 일지도 몰라. 너의 최선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나의 최선은 늘 너를 외롭게 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이별을 결심했다. 이별을 결심한 다음 날 너와 공포영화를 보러 갔다. 사람이 조각조각 잘려나가는 모습에도 무덤덤하게 스크린을 바라보는 너는 평소처럼 늘 고요했다. 사랑에 빠지던 때에도, 사랑이 끝나가는 지금에도 너는 항상 그렇게 무덤덤하구나. 어쩌면 너에겐 우리의 시작도 결말도 저영화처럼 무던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참으로 달려가는 마음을 멈춰 세우기 위해 너를 비난했다. 너는 참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거 같아. 대단해, 어쩜 그런장면에서도 어떻게 한번도 눈을 안 가릴 수 있어?   


- 나 공포영화 싫어해. 너가 보러 가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어서 참고 보는 거지. 내가 눈을 가리면 너가 민망해질수도 있잖아. 난 사실 널 만나기 전에는 영화관에서 공포영화 보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갔는데 너를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고요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이 순간조차  너는 역시 무덤덤하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 밝을 줄 알았던 하늘이 어둡다. 나는 문득 월식을 생각한다.


내선순환 열차와 외선 순환 열차가 한 승강장에서 겹쳐지는 순간 반대 편 승강장에 선 애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듯, 음력의 궤적과 양력의 궤적이 겹쳐지는순간 자신의 빛을 가리는 달을 해가 포용하듯 너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사랑 했었나 보다. 너는 단 한번도 공포영화를 좋아한 적도, 매운 음식을 좋아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네가 그것들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살았다. 너는 지금처럼 늘 무던함의 구조로 내 음력의 생이 너의 양력의 생을 가리는 것을 그저 ‘그럴 수 있다고’ 덤덤하게 받아들여온 것이다. 그렇게 덤덤한 방식으로  나로 너를 가리 시간들을 하루씩 연장하고, 내 작은 그림자가 가리지 못하는 너의 과된 부분들을 서서히 깎아 내는 방법들을 배운걸까. 나의 구조와 규칙들이 헤아릴 수 없는 너를, 나는 감히 곁 눈짓으로 헤아리려 한다. 나로 닳아간 너의 그 잘려나간 면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파서 울고 있을까, 즐거워서 웃고 있을까,아니면 너처럼 그렇게 무던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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