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기에 사랑한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 말하는 법을 배웠다. 당신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미안하다는 말을 고마움과 감사함을 직조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움의 틀 위에 당신을 사랑했던 마음 한 가닥, 당신에게 미안했던 마음 한가닥을 엮어가며, 당신이 내 생에 차지했던 면적을 넉넉하게 덮고도 남을 담요를 짰다.
1. 초겨울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흘러가는 마음의 계절이 있다는 걸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다. 목련이 지던 계절에 사랑을 끝낸 마음이 겨울비 내리는 스산한 오후와 저녁 사이의 날씨 속에 꽤 오랫동안을 머물렀다. 매일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익숙하기에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앙상한 가지에 걸어두고 당신이 건조되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얼어붙은 가지에 걸어 놓은 직물에서 부슬비처럼 흘러내리는 당신을 맞아가며, 하루하루 그리움을 씹어 삼켰다가 뱉었다가 다시 씹으며.
2. 겨울의 심연
당신의 부재가 닿은 것들은 본래의 색에 상관없이 언제나 당신으로 물들어 얼룩이 빠지질 않았다. 당신을 잃고 뒤돌아선 내 등 뒤에서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웃고, 누군가를 사랑할 당신을 생각할 때면 눈에 익은 모든 정경들이 살아있는 생명체를 단 한 번도 만나본적 없는 차가운 장면으로 식어가는 온도를 버텨야 했다. 하루는 빨리 당신이 건조되어 사라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다가 또 하루는 증발되어 사라지는 당신을 참을 수 없어 가슴에 부둥켜안았다. 당신으로 젖어든 것들이 닿은 부위에 바람이 스치면 스치는 곳마다 새파랗게 얼어붙어 아픔도 추위도 느낄 수 없는 타인의 신체처럼 변해갔다.
3. 겨울의 중간을 넘어
심연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건조되어가는 것들을 하나 둘 가지에서 거두며 나는 당신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게 남기고 간 얼룩이 아닌, 우리의 찬란했던 순간들의 가슴 시린 빛깔 위에 피여 있는 당신을. 나의 아픈 시간을 기다려주었던 당신의 모습을, 나의 미 성숙함을 품어주었던 당신의 마음을, 틀림을 다름으로, 변덕을 변화로, 미움을 미안으로, 나의 미성숙이 성숙으로 봉우리를 틔울 때까지 거름을 주고 기다려주었던 당신이 내게 남기고 간 것들. 당신의 부재와 현존 사이의 방 안에서 나는 내게 남겨진 당신의 산물들을 실로 뽑아 선물로 짜기 시작했다.
그 어떤 계절에도 나를 마중 나오던 당신의 넘치는 다정함이 떠오를 때면 고마움 한가닥을, 당신과 다른 내 삶의 속도에 발맞춰 걸어주던 당신의 배려가 떠오를 때면 감사함 한가닥을 고마움 위에 엮었다.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나를 바라보던 당신의 눈빛이 떠오를 때, 언제 어디에 있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집 같았던 당신의 품이 떠오를 때면 그 사랑이 남기고 간 아린 추억들을 곱씹으며 그 순간들이 내 인생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 한 가닥,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너무도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쳤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고마움을 한 가닥. 돌아올 수 없는 장면들을 마치 가을철 농부가 지난 노고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하나하나를 수확해 매듭 속에 엮으며, 그렇게 나는 당신과 내가 같이 만들었던 기나긴 터널을 걸어 나갔다.
4. 목련이 꽃망울을 틔우는 계절
그렇게 나는 시린 계절에도 봄처럼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줄 수 있는 따스함을 얻었다. 이제는 사랑이라 부를 수 없게 되어버린 그 순간들의 작은 의미들이 촘촘하게 직조되어, 당신이 주고 간 그 사랑이 남긴 산물들이 선물이 되어, 하나의 따스한 시선으로 내게 녹아들어 왔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당신이 내게 보여주었던 다정함으로, 인내로, 사랑으로 다른 누군가를 마주하게 되겠지. 이제 나는 더 이상 당신의 부재가 아프지 않다. 더 이상 당신을 떠오르는 일이 서글프지 않게 된 나는, 당신이 나를 바라보던 그 따스한 눈길이 녹아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