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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et Nov 02. 2020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아서

당신이 나의 우울을 쓰다듬는 방식에 대한 고찰

우울이 내 문을 두드리는 날이면 너는 꽃을 선물하곤 한다

언젠가부터 S의 우울을 보살피는 것은 애인의 버릇이 되었다. 그는 전혀 덜 우울하지 못한 방식으로 매워질 수 없는 그 공백의 바닥을 측정하곤 한다.   


밖에 나가서 뭘 하는 건 어때, 영화라도 한편 보고 오면 덜 우울하지 않을까, 이제 책은 그만 읽는 게 어때,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니, 친구라도 만나서 커피라마시러 가, 좋은 식당에서 좋은 밥도 먹고, 예쁜 옷도 사 입어봐, 혹시 돈이 부족하다면 내가 보내 줄게, 그걸로 너가 조금은 덜 우울했으면 좋겠다, 나는 너가 보고 싶은데, 너는 어때, 만나러 가고 싶다.


감기약을 먹으면 기침이 멈추고, 상처에 약을 바르면 상처가 아무는 방식으로 그는 한철 앓고 가는 지독한 독감인 양 S의 우울을 쓰다듬는다. 조금 덜 생각하고, 덜 복잡해지면 그만큼 덜 우울할 수도 있다고. 그림자가 짧은 사람, 그는 우울을 모른다. 단 한번이라도 등 뒤로 늘어선 그림자가 길어지는 자신의 길이를버티지 못해 앞으로 돌아온 것을 발견한 적이 있을까, 자신을 앞선 그림자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내 그림자의 깊고 넓음을 발견하고 당황한 적이 있었을까, 빛이 있는 한 그림자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해본적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서운 겨울 창가에 머무는 한 줄기 따스한 햇살 같이 그의 다정함은 따스하다.  

 

그렇게 그가 못 견디게 다정할 때면, 그 다정의 조각들을 묵주로 빚어 알알이 끼워 목걸이로 만들고 싶어진다. 천주교 신자가  묵주알을  헤아리며 기도로 신의 응답을 찾아 헤매듯, 신을 믿지 못해 우울해지는 날이면 대신 그의 마음을 종교 삼아 그 다정의 알들을 헤아리며 내 안식을 기도할 수 있도록. 마음이 차고 넘쳐 병이 되어버린 사람. 목에 건다면 목을 천 번은 감고도 남을 그 목걸이. 내 목은 그 천 겹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부러져 버릴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의 다정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겠다고 각한다.


익숙한 우울이 모르는 새 낯선 베개 밑에서 틔운 싹을 발견한 어느 밤. 이 곳은 집에서 8900km 나 떨어진 이방의 도시.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 만을 챙겨왔으면 좋았을 것을, 뒷주머니에서 우울을 빼 두는 것을 까먹은 S는 자신의 우울을 이 머나먼 이방의 도시까지 데려와 버렸다. S는 새로 돋아난 어린 싹이 자꾸만 배겨 잠을 이룰 수 가 없다. 그렇게 감을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의 삶에서 상실되어간 것들을 헤아리며 기나긴 밤을 소진 시키고 있다. 7시간이나 빠른 내나라의 아침에서 이곳의 밤으로 아직 생을 옮겨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 다독이는 동안 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일상에 몰두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걸려온 엉뚱한 전화에 S는 왜 또 이 시간에 전화 했어, 나 자야할 시간이란 말야-  라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는다.  


너가 또 우울해서 못 자고 있을게 뻔하니까 몰래 화장실 가는 척 하고 나와서 전화했지. 전화를 받은 걸 보니까 넌 아직도 우울 하구나, 난 너가 우울한 게 참싫어. 너의 우울이 정확히 뭔지 난 잘 모르지만 말이야, 우울이 너의 곁에 있을 때 나는 앉을 자리가 없어서 우왕좌왕하게 되거든.  


그의 물음에 알맞을 대답을 찾기 위해 S는 자신의 우울에 대해 생각한다. 우울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내가 여태 버려온 무언가의 흔적 일지도몰라.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고, 다양한 구멍들로 머물러 있는 그 흔적들 속에 갈 곳을 잃은 바람들이 곤두박질 치며 나 대신 그것들을 애도하는 걸지도 몰라. 그 소리들이 이토록 나를 아프게 만드는 건 아닐까.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우울할 때 난 맨날 알 수 없는 소리들을 들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슬픈 소리라는 건 느낄 수 있거든- 이라 생각한다.

 

- 뭔지는 몰라도 난  싫어, 너를 아프게 하니까 난 싫어할 수 밖에 없지.


애인의 S의 우울을 질투한다. 그의 머리 속에 우울은 S의 사랑을 가로채 가는 내연의 애인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우울은 S의 속성, 그 생의 역사, 결여, 슬픔 그리고 죽음이 아니면 사라질 수 없는 하나의 신체기관. 그의 오해가 유치해서, 다정 해서 S는 웃음이 난다. 당신의 넘치는 다정함이 내 우울을 죽인다면, 그 우울 자체이자 주인인 나도 죽게 될 텐데. 당신은 그건 모르겠지. S는 자신의 애인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그에게 조언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내 우울도 사랑해줘. 너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그 모습들의 뒷모습이라 생각해줘. 앞모습과 뒷모습이 같은 사람은 세상에없잖아, 그러니 똑같이 예뻐 해줘. 나 대신 내 우울을 쓰다듬어줘. 불행하게도 나는 내 뒷모습을 볼 수가 없는데다가 팔도 짧아서 만질수도 없어. 너가 내 대신 나의 뒷모습을 따스하게 바라 봐주고 어루만져줘. 내가 사랑하는 너가 내 우울을 사랑해준다면, 나도 내 우울을 조금은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꼭 그런 기분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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