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을 잘라 당신에게 줄 수 있다면 내가 아는 가장 온화한 풍경 속에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이 단 한 번이라는 것만큼 자명하고 견디기 어려운 비극이 또 있을까. 누군가는 태어남 그 자체가 인간이 지닌 원죄가 된다 하던데, 그래서 인간은 인생이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형벌을 지고 태어나는가 보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대부분의 비극들도 이 슬픈 진실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인생을 단 한 번 만 더 살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정말 잘 살아볼 수 있을 텐데. 시선의 소멸점에서부터 하루하루 다가오는 죽음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두려움 없이 ‘좋은 생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인생을 다 바쳐 미친 듯이 더듬거려도 끝내 볼 수 없는 그 많은 것들, 그것들을 한 번쯤 은 이 두 눈으로 그 끝자락의 그림자라도 훔쳐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살아 있는 날들이 뉘우칠 그림자 만을 연장시키는 짐이 아닌 생을 살아볼 수 있을 텐데. 후회와 그리움을 온 몸에 덕지덕지 바르고 살아있는 매 하루하루마다 굳건하게 축적되는 애도의 벽 앞에서 울지 않아도 될 텐데.
신의 관용이 내게 여분의 생을 허락한다면, 그 삶은 앞 전의 생에서 내 시간들을 바치고 싶었던 사람을 위해 살아볼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내 시간을 잘라 또 한 번의 삶을 내어줄 텐데. 앞서 지나간 삶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비난도, 교훈을 제공하기 위함이 아니고, 유의미한 개선이나 발전을 위함도 아니다. 그저 단지 산다는 것이 햇살이 너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따듯한 어느 오후, 반짝이는 냇가에 발을 담그는 그런 기분일수도 있다는 것, 그런 온화한 기분으로 보내는 인생도 있을 수 있다고. 당신이 그런 기분으로 살아보라고. 이기적이라 해도 괜찮으니 온전히 당신 하나만을 위해서 제일 햇빛이 잘 비치는 자리에 오랫동안 그 기분을 느끼고 오라고 해주고 싶다.
그동안 나는 항상 어디론 가를 향해 떠나는 나를 배웅하던 당신처럼, 거슬리지 않는 작은 점으로 시야의 저 먼 끝 지점에 서서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며 기다릴 것이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반갑게 손을 붙잡고 이번 삶은 어땠냐고 물어보고 싶다. 숨 가쁘게 밀어닥치던 지난 시간 속에서 신기루처럼 몽롱하게 스쳐 지나갔던 것들, 당신이 잃어버렸던 낭만이, 첫사랑이, 꿈이 어땠냐고 물어보며 소멸 점을 향해 천천히 같이 걸어갈 것이다. 당신을 기다렸던 시간만큼 나도 당신과 비슷하게 소진되어 갔을 테니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소진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슬픔도 회한도 없이 그저 서로의 손을 잡고 한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걸음에 맞출 필요도 없이 함께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뱃속에서부터 양손 가득 무언가를 당신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훔쳐온 것만 같은 그런 오래된 죄책감도 조금은 가벼워질 텐데.
라고 s는 생각한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는 결국 흰머리가 생기고 말았다며 소진을 슬퍼한다. s는 사실 s는 엄마보다 더 오래전부터 엄마의 소진을 슬퍼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작아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커진 것일까, S는 후자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당신의 몸이 예전과는 달리 품 안에 덜 들어찬다는 것을 느꼈을 때, 오래전 사진 속의 얼굴과 지금 내 눈앞의 얼굴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낄 때, 그토록 강한 줄 만 알았던 당신의 어깨가 모두가 잠든 밤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내가 더 이상17살이 아니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 당신의 모습을 볼 때, 집에 돌아왔을 때 집 안에 내가 없는 것이 더 익숙해지는 것을 슬퍼한다는 걸 알았을 때. 한때 당신의 딸로 태어난 게 자신의 불행이라 생각했던 s는 이제부턴 엄마를 사랑해서 슬퍼지는 일이 많이 생길 것이라는 걸 깨 달아 버렸다. 이렇듯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S를 아프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