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온전하게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고찰
s는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실어증에 걸린 상사병 환자에 대한 글을 꼭 한 번쯤은 써보고 싶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스스로가 어떻게 말해야 자신의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애인에게 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말은 일회용 빨대처럼 엄숙한 최초의 발화 이후에는 용도를 상실한 텅 빈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이후에 전달되는 사랑의 고백은 그저 주체와 ‘그’ 사이의 관계를 공고하게 고정하는 고정핀에 불과한 볼품없는 말로 전락되거나, 속박의 도구로 변질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런 왜곡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연인들은 주기적으로 사랑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도박에 큰 대가를 걸곤 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말들을 찾아보자. 나는 너를 사랑해, 내가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너에게 나의 사랑을 전할 게와 같은 직관적인 문장들도 있다. 내 마음은 호수이니 당신은 노 저어 오세요,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달이 참 밝네요와 같이 상징성이 있는 문장들도 있다. 이렇게 온갖 영화와 소설과 노래 가사의 사랑 고백들을 모아 놓고 가장 어울리는 말을 골라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런 일은 항상 s를 ‘80% 정도만 어울리는 옷들을 골라 놓고 첫 데이트 때 어떤 옷을 입을지 골라 주길 바라는 친구를 앞에 두고 쩔쩔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이건 비단 s 개인의 개별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너무도 단순한 말을 과하게 해석하려 하는 편집증 환자 같다고 반문할 수 도 있다. 물론 언어를 파고드는 일에 있어 과대해석은 치명적인 장애물이 분명하지만, 과대해석이란 돌부리에 발목을 삐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토록 말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언어를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련된 문장들처럼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인 문장들을 두고 과대해석에 발목을 삐지 않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저녁에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낭만적인 저녁이었다. s와 친구 m은 낭만적인 저녁을 최대한 낭만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사랑을 말하는 방법에 대한 주제를 식탁 위로 올렸다. 왜 우리는 언어의 농간에 놀아날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말하고 싶어 하고 사랑을 듣고 싶어 하는가? 그 어떤 말로 도 명확하게 그 추상을 표현할 수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이 오히려 사랑으로 위장한 폭력으로 변질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가장 보편화된 다음의 문장은 과연 얼마나 사랑의 의미를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다음의 분석을 통해 사랑을 말할 때 사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문장의 폭력적인 구조를 알아보고자 한다.
- 나는(주어) + 당신을’(직접 목적어) + 사랑해요(타동사) (Je t’aime)
주어, 직접 목적어, 타동사로 이루어진 다음의 문장은 사랑에서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인 대상에 대한 소유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타동사로 구분되는 ‘사랑하다’는 타동사의 특성상 행위의 대상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때 행위의 주체인 ‘나’의 사랑 행위를 받는 대상으로 설정된 직접 목적어인 ‘당신’은 내게 사랑을 받을 의무를 지게 되며 나의 소유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동시에 나에게 사랑을 다시 반환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된다. 한층 더 깊게 살펴보면, ‘너는 나의 사랑을 받는 나의 것이다’라는 의미에는 동시에 반환의 의무가 함축되게 된다. 즉,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는 너는 나의 소유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내가 준 사랑을 반환할 것으로 요구하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 소유로 바뀌어가는 과정이 누군가의 눈에는 아직도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 ‘사랑하다’라는 동사를 ‘부른다’로 바꿔서 다시 가정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어떤 친구가 갑자기 와서 ‘내가 너를 불렀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보자. 자연스럽게 그 문장에서 ‘내가 부르는 행위의 대상은 너이고, 내가 불렀으니 너는 나에게 응답해야 한다.’라는 함축된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반 정도는 친구의 부름에 별다른 불만 없이 응할 것이고 나머지 반은 ‘나는 너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너의 부름에 반드시 응답할 필요는 없을 텐데’를 떠올릴 것이다. 그중 또다시 반은 뒤 이어 ‘왜?(부른 이유)’에 대해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행위에 ‘왜?’가 붙게 되는 문제, 행위에 이유가 필요해지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타동사는 동작의 대상인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동사이다.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행위에 왜 그 특정 대상이 필요하게 되는지에 대한 추론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게 한다. 사실 사랑의 이유를 묻는 일은 애인 사이에서는 실로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하고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례로 S의 한 친구의 경우 농담 삼아 ‘남자 친구한테 나를 왜 사랑하는지 물었을 때 대답을 못한다면, 그는 분명 너의 사망보험금을 노리는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각자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분명 여러 가지 이유들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 자체가 좋을 수도 있고, 그와 함께한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돈, 직업, 명예와 같은 것들도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에 이유가 있다는 것은 행위에 대한 개연성을 높일 수는 있으나, 동시에 그 이유가 없어지면 이 사랑은 소멸된다는 한계를 내포하게 되는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문장은 ‘나는 어떠한 이유로 인해 당신을 나의 사랑의 대상, 즉 나의 소유로 생각하고 있으며, 당신 또한 나의 행위에 대해 같은 양으로 보답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게 했던 이유가 사라진다면 당신과 나의 소유관계는 끝나게 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문장 중에서 사랑의 의미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문장은 어떤 것 일까? 다음의 문장은 뤼스 이리가레가 제시한 사랑의 본질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문장이다.
- 나는 + 당신 + 에게로(전치사) + 사랑해요. (J’aime à toi)
위에 분석한 문장에 이리가레는 방향을 가리키는 전치사 ‘에게로’를 붙여 ‘당신’을 단순한 간접 목적어의 역할을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에게로’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일정한 간격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는데 이를 통해 ‘당신’은 내가 흡수해야 하는 소유 대상이 아닌 거리를 둔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주체인 ‘나’는 차이와 거리를 인정하면서 또 다른 주체로서 당신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된다. 이리가레의 이런 깊은 통찰이 담긴 분석을 통해 우리는 제시된 문장이 사랑의 본질을 보존하기에 적합하다고 설득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적 분석과 언어의 실 사용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고정된 말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리가레의 분석에 동의하는 사람일지라도 막상 애인에게 사랑을 말하려 하는 순간 ‘나는 당신에게로 사랑해요’에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를 말하게 될 테니 말이다.
m: 그런 거 아닐까. ‘사랑한다’는 말은 애인관계에서 그냥 선물 같은 거 아닐까? 나의 사랑이 당신을 좀 더 행복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선물 같은 거지. 선물을 포장하는 방법이야 다양할 수 있어도 또 뭐가 담겨있어도 결국 본질은 내 바람 하나지. 나는 ‘나는 너를 사랑해’가 성분들로 구성된 문장은 아니라고 생각해. 오히려 하나의 단어나 으악 같은 감탄사에 가깝다고 봐. ‘난 널 사랑해’와 ‘널 사랑해’와 ‘사랑해’는 형태는 달라도 받아들여지는 건 똑같지 않아?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는 순간들을 한번 생각해봐. 그런 구조적 의미가 과연 정말 유효하게 사용될까?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 발화되는가? 당신이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 절대적인 무언가처럼 느껴질 때, 신이 내게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당신이 보장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을 때, 당신의 논리와 감정이 내 세상을 억압할 독재자의 도그마라고 해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을 때.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 일까?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아름다움을 급작스럽게 마주할 때 나의 논리와 생각보다 빠르게 감탄사처럼 툭하고 나오는 말, 헤어 나올 수 없는 어두움 속에서 헤맬 때 손을 잡아끌어줄 구원자를 만난 것처럼 나지막이 터져 나오는 말, 그런 벼락같은 순간들이 찾아올 때면, 혀가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을 꺼내 정렬하고 다듬는 일이 너무도 피로하게 느껴져서 상투적인 말들만 그저 바보처럼 되씹게 되는 그런 말. 저녁에서 밤으로 기울어져 가는 동안 사실은 한 마디의 감탄사에 가까운 말을 두고 계속된 s와 m의 토론은 어쩌면 일 년 중 가장 낭만적인 저녁을 가장 낭만과 거리가 먼 방식으로 낭비한 무용한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