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축복
이십 대 한창 고민이 많던 시기에 한 선각자를 만난 적이 있다. 죽는 꿈을 자주 꾼다는 괴로움을 표현하는 상황에서 의외의 다른 반응을 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 죽음은 곧 삶이 무상하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죽음을 꿈에서 경험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때는 위로해 주는 말인가 싶어 바로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 말이 저절로 고개 끄덕여진다.
고대 로마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삶을 잘 사는 비결이며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서 늘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는 이 모든 세상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주하고 있는 이 세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이 세상은 찰나 찰나에 변하고 있는데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눈과 귀가 그대로 이 세상이 유지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더불어 이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는 것 역시 그 자체를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경험에 의해서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 해석을 스스로 알아차리든 못 알아 치리 든 말이다.
무상은 곧 변화다. 변화를 섬세하게 알아차릴수록 그 무엇도 머릿속에서 재생할 수 있는 고정된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아니, 재생되더라도 그것이 허상이자 스스로의 해석일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저 멀리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지금 눈에는 빛나고 있지만 이미 사라진 별의 잔상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천문과학자들의 이야기다.
바로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찰나 찰나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의 눈이 우리가 경험한 어느 한 지점의 모습을 사실이라고 여기게 되지만 그 또한 잔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 잔상이며, 그 잔상 또한 우리의 감각인지 시스템이 해석한 결과라고 생각해 보면 사실이라고 딱 달라붙던 의식에 여유공간이 생기면서 놓여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아무것에도 가닿을 바 없이 비어있는 의식을 마주하게 된다. 혹자는 허무라고 하기도 하고, 허전함으로 느끼기도 하는 이 비어있는 마음은 실제로 우리의 본질이다.
밖에서 무언가를 구하려던 마음이 아무 구할 바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록 허무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밖에서 구하지 않아도 이미 충만한 그 마음을 알기만 하면 밖으로 향하려던 마음은 저절로 꼬리를 내리고 녹아나게 된다.
무상은 바로 이 비어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회복시킨다. 누가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유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잃어버릴 수도 없는 이 본질을 우리에게 마주하게 한다.
무상을 일찍 깨닫는 자는 축복을 받는 자라고 하는 선각자의 말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수긍된다.
더불어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변과 자기 내면의 모든 것을 생생히 깨어 알아차리고 그 변화에 깨어서 집착할 그 무엇도 없음을 아는 것, 더불어 그 아무것 없는 빈 마음이 우리네 삶의 본질임을 아는 것.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가 된다.
죽음은 곧 무상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수행자들은 책상 위에 해골을 늘 올려두고 무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삶의 측면에서도 바로 앞에 있는 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내 앞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상하게 사라져 버릴 존재임을 안다면, 그렇게 함부로 대하거나 집착하겠는가.
무상함이 있기에 삶은 의미가 있고 더 소중하며 축복인 것이다. 죽지 않고 끝끝내 살아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라도 형벌일 수밖에 없다. 무상을 생각하면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 딱 붙어있던 빡빡한 마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여유로워지고 삶을 살아가는 가장 본질적인 물음에 마주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 사람이 굳는다는 것은 몸 자체가 굳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은 마음이 굳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굳는다는 것은 곧 무상한 그 무엇엔가로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의 일이요, 순간순간 말랑말랑하고 생기 있게 깨어있는 자신의 실존을 외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무상하게 변화하는 줄 아는 이의 마음은 지금 여기 자신의 생생한 실존 속에서 깨어있으면서 그 무엇 에로 향하여 고착될 일이 없기에 굳을 일도 없다.
자기 자신의 본질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무엇으로 대체해서 일어나는 부작용이 바로 굳음이요 본질을 만나려고 그 굳음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 상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