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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일 Dec 11. 2024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자랍니다


예전 살던 동네는 참 정겨운 곳이었다. 초록이 풍성한 공원이 가까이 있고, 두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친절한 이웃이 많았다. 소원이었던 ‘도서관 앞에 사는 일’이 이뤄진 곳이기도 했으니. 좋은 추억이 많이 쌓인 동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가 덮쳤다. 확진자 증가로 놀이터에 접근 금지 테이프가 붙던 날의 암담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함께 뛰어놀 나이에, 서로를 위해 거리 두는 법을 배워야 했던 날들. 아이들은 두 살을 더 먹어가고 있었다.



아이답게 마음껏 뛰어노는 시간이 충분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삶이라는 흰 종이가 모두에게 한 장씩 주어진다면, 아무런 필터 없이 경험과 감정을 적어볼 시기는 아무래도 어린이 시절 아니겠는가. 미국의 건축가 버크민스터 풀러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이들은 천재로 태어나지만 살면서 천재성을 잊어버린다고.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경험의 묶음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경험과 놀이, 공부의 경계선이 희미한 시간도 괜찮지 않을까. 반듯하게 줄이 그어진 노트보다, 무엇이든 마음껏 그려보는 연습장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양양은 다양한 경험을 위한 최적화된 도시였다. 스포츠 천국이기도 했으니. 자전거도 못 타던 아이들이 서핑, 야구, 인라인, 마라톤, 요트, 등산, 수영, 파크골프, 볼링뿐 아니라, 겨울에는 인근 도시로 스케이트를 타러 가고, 스키장도 40분 내외로 가까웠다. 2년 반 만에 10가지 넘는 운동을 경험하다니. 도시에 살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보를 찾아보면 무료로 지원되는 수업이 많다. 저렴한 이용료로 체육 시설을 이용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밖으로 나가면 어디든 자연과 이어져있다는 것. 나 같은 집순이마저도 문 밖으로 나가게 되는 그런 환경이었다. 덕분에 설악산 대청봉을 완등할 정도로 엄마의 체력도 함께 레벨업이 되었다고.



몸을 움직이며 체력이 좋아지고 마음도 건강해지는 일상이 가능한 곳이다. 아이들은 운동 하나를 일정 수준까지 마스터하는 과정에서 인내심과 집중력을 키우고, 다른 운동에 그 배움을 적용한다.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과 도전을 시험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야구 같은 단체 스포츠에서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과 협동심, 책임감까지도 배울 수 있다. 소극적인 성격의 둘째가 야구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야구팀에서 가장 막내였던 둘째가 여러 형들 틈 사이에서 나름의 성장의 시간을 갖었던 셈이다. 엄마로선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다.



도시에서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만 놀고 공부해야지!’라고 말할 날이 내게도 올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문제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비슷한 생각의 결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그런 뜻이 통하는 학교를 찾아간 것은 행운이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시간을 허락할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인생에서 잠시라도 곁길로 새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덧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둘째가 너무 좋아하는 친구들의 학부모님이자, 외모만큼이나 마음도 반짝이는 전옥랑 작가님. 비록 나에게 귀촌은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지만, 양양에 너무도 고마운 마음이 있기에 브런치북으로 작은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작가님 덕분에 둘째도 자신만의 양양 이야기를 남길 기회가 생겼다.



작가님이 속한 북서프 모임에서 어린이 그림책 만드는 일을 기획하였고, 둘째도 초대받았다. 낯선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을 어려워하는 둘째이지만,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어 선뜻해본다고 나섰다. 양양에 살고 있는 여덟 명의 어린이들이 모여 각자가 품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해파리, 연어, 서핑, 흔들바위, 쌀, 송이버섯, 바다유리, 눈사람. 양양의 특별한 친구들을 소개하는 책의 제목은 <양양의 친구들>이다.


엄마랑 같이 있으면 쑥스럽다며, 혼자 씩씩하게 모임에 참석하는 아이. 유난히 껌딱지였던 둘째가 엄마 없이 출판기념회에도 참석했다. 밝은 에너지로 아이들의 생각을 끌어올리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선생님들과 예쁜 색감의 그림으로 각색해서 엮어주신 모다인 작가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어른들과 함께하는 경험이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갔을까. 자신의 생각과 경험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이 무척이나 좋았다고. 그리고 자신의 그림이 책이 되어 두 손에 도착했다. 둘째는 자신감을 얻은 두 번째 경험으로 ‘그림책 작가’가 되어본 일을 꼽았다.



어느 여름날, 첫째는 바다에서 반나절을 혼자 보냈다. 바람이 불어 제법 파도가 있는 날이었다. 첫 번째 서핑에서 강사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던 나는, 두 번째 서핑을 호기롭게 혼자 해보려다 두 손 들고 포기한 날이기도 했다.



파도를 기다리고 잡아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이는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배고프지 않다는 외침 뿐이었으니. 하염없이 파도를 기다리다, 다가오는 파도를 확인하고 방향을 돌려 패들링 하고, 타이밍을 잡아 일어서 파도에 올라타는, 무한반복의 시간이었다.



물에 발을 담그는 일도 어색했던 아이가, 파도를 잡아타는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 무수한 도전과 깨짐을 반복하면서도, 성공의 짜릿함을 알아가는 첫째의 모습이 부러웠다. 어딘가로 놀러 갔던 기억이 거의 없는 어린 시절의 내가, 모래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들이 가장 잘하는 일은 ‘아이들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고백하자면 나 또한 그랬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부족한 부분만 어찌나 눈에 잘 들어오던지.


고쳐줘야 한다고, 채워줘야 한다고, 조바심 내며 불안했던 시간을 뒤로하며 반성했다. 너무도 다른 성향의 두 아들은 엄마의 걱정과 판단 없이도 잘 자라고 있었다.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지키고,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을 고유한 무늬로 새기면서 말이다.



한 달에 한 번 전교생이 모여 축하와 발표를 하는 다모임 시간.

올해의 마지막 다모임 발표 시간에 첫째는 앞에 나가서 이렇게 말했다.


“ 여기에 많은 친구들이 도시에서 전학 왔을 거예요.

저도 이곳에 온 지 2년 반이 지났습니다.

도시로 가서 다시는 이 귀중한 경험들은 못하겠지만

여기서 배운 것들로 더 먼 미래로 나아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내 마음대로 마음껏 그려보는 연습장 같은 시간이 되었기를.


이곳에서의 다시없을 귀중한 경험들을,

아이들의 활짝 웃는 얼굴을 기억해야겠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잘 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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