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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일 Dec 18. 2024

비움은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다


이사 올 때의 이삿짐 무게는 돌아갈 때에도 같다. 1시간 만에 이사가 끝나고, 트럭에 여유가 있는 걸 보면 짐이 더 줄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는 알고 있다. 우리 가족에게 적정한 소비 커트라인을. 흘러 들어오는 것들과 비워내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알맞은 균형을 찾는 일까지도. 소유의 무게감을 알게 되었기에 즉흥적인 소비도 줄었다. 이사오기 전, 남편과 함께 불필요한 짐을 정리했을 때 터득했던 것이리라. 3개월 동안 지난했던 정리의 과정을 겪으며 깨닫게 된 것들이었다.



지금도 남편의 당근은 늘 활성화 상태다. 아무래도 지역 특성상, 이곳에서의 당근 거래는 물건의 종류가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도시에 있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제는 당근 거래에 있어서 나보다 전문가가 되었으니. 필요한 물건을 부탁하면 도시에서 사다 주고, 필요 없는 물건을 보내면 깔끔하게 거래를 완료한다. 당근 입문을 권했던 나로서는, 여간 뿌듯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 남편의 당근 온도가 매우 따끈따끈해졌다는 사실이다.



반면, 나의 당근은 비활성화 상태다. 거래 목록 1위는 늘 책이었는데, 2년 반 동안 거래가 0건이다. 로컬의 도서관은 작은 서점 같다. 도시에서는 3명 정도의 예약자가 있어야 할 신간 교육 도서가 그대로 있을 때도 있다. 신간 도서의 경쟁률이 매우 낮기에, 내 책을 살 일이 거의 없었다. 도서관 가는 날마다 서점 구경 가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고 설레였다고.



아이들의 책도 마찬가지다. 도시에 비한다면 종류가 부족할 수도 있지만, 있을 만한 책들은 다 있는 편이다. 책 컨디션 또한 매우 좋았다. 그러니 도서 지출비가 제로인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사 갈 때 아쉬운 것 중 하나는, 아마도 이 지역 도서관이지 않을까.



아이들은 해마다 무럭무럭 자란다. 작아졌지만 깨끗한 옷들은 모아서 매년 4월 한살림의 옷되살림으로 보낸다. 올해 첫째는 내 키를 넘어섰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2벌 정도의 옷을 새로 산다. 둘째는 자연스레 형의 옷을 물려받지만, 바지만은 어려울 때가 많다. 남자아이들이라 무릎 부분이 성할 날이 없으니. 매장에 맡겨 예쁘게 수선을 마치고 돌아와도, 다시 구멍을 내어온다. 그것도 며칠 만에 말이다. 최대한 티 안 나게 바느질해서 입히며 결심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바지만큼은 1+1으로 구입하기로.



남편은 내구성이 괜찮고, 좋아하는 컬러감의 새로운 브랜드를 찾아 정착했다. 당근에서 해당 브랜드의 새 제품이나 괜찮은 가격의 옷을 사기도 한다. 그렇게 원하던 백팩도 새로 장만해서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유용하게 쓰고 있다.



나도 이제 무언가를 살 때 서두르지 않는다. 오랜만에 있었던 친척 결혼식에도 5년 전 정장을 다시 꺼내 입었다. 정말 필요한 옷이 생겼을 때,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을 때, 신중히 지갑을 열게 되었다.



남편에게 작아진 셔츠 두 벌은 내가 정말 좋아했던 옷이다. 뜨거운 햇볕과 냉방병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괜찮은 브랜드였기에, 데일리 아이템으로 3년 동안 잘 입었던 것 같다. 옷의 개수가 적으니 잦은 세탁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가볍고 유용했던 셔츠의 넥 라인이 되살릴 수 없을 정도로 해져 갈 때의 아쉬움이란. 그동안 고마웠다고. 이제는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다.



가족의 옷장을 고요한 상태로 유지하는 일. 각자의 취향대로, 때로는 서로의 옷을 공유하면서. 비우고 채우면서 살아간다.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 구입했던 나무 텐트도 지금껏 헹거로 잘 사용하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옷장 사이에서, 또 자리를 잘 잡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사할 때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냉장고다. 다른 살림살이를 이삿짐센터를 통해 옮겼지만, 주방 이사는 전적으로 내 몫이다. 살림이 많지 않아서 조금씩 정리하면서 매주 나르고 있다. 5번의 이사로 고생한 12년 된 나이 든 냉장고가 있다. 아이들에게 우리 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으로 통한다. 이사의 충격으로 한쪽 바퀴는 부러지고, 고장 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잘 작동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옮기다가 고장이라도 날까 싶어, 여기에 남아서 마지막 본분을 다하기로 하였다.   


이제 진짜로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냉장고 속의 재료들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냉동고에 남은 건미역과 육수용 멸치, 감태는 이사 가기 전 사용할 것이고, 다진 마늘과 생강, 그리고 지인 분이 주신 소중한 바질 가루를 챙길 것이다. 냉동고는 너무 비워도 효율이 떨어지기에, 임시로 빈 플라스틱 통을 넣어 80% 가까이 채워둔다.



냉장고는 야채와 과일을 매주 적정한 양으로 구입한다. 반찬은 1-2번 먹을 정도로 적은 양을 요리한다. 기타 조미료를 포함하여 이 두 바구니에 남은 것들을 옮길 계획이다.






캡슐 커피 수거를 마지막으로 신청하고,

받았던 화분들의 시든 잎을 잘라내며 올려 보낼 준비를 한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때마다,

다시 비우고 정리해야 하는 시기가 왔음을,

구석에 쌓인 먼지를 닦아야 할 때가 왔음을 실감한다.



새롭게 시작한다고 해서, 새로운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정체되었던 공간을 비우면,

마음까지 새로워진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이 아닌,

내가 가진 것들을 살펴보고, 적절하게 비워내는 시간.


비움은 새로워지는 일이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새로운 공간에서도, 다시 우리다워지기를 기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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