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므앙느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여행 8화

by 김지현

배를 타고 농키아우를 떠나 므앙느아로 향했다. 므앙느아에 가까워질수록 90도로 가파르던 산의 경사가 완만해졌다. 므앙느아에 도착해 방갈로에 숙소를 정하고 나서 산책을 나섰다. 비온 뒤의 해가 너무 강렬해서 그림자를 찾는데, 나무 그늘 아래서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만든 인형들이었는데, 가지 끝을 잘게 쪼개 만든 머리카락들이 치렁치렁했다. 인형들은 나뭇잎 베개에 나뭇잎 요를 깔고 나뭇잎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나도 인형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먼 동네에서 왔으니 색다른 인형을 선보이겠다는 욕심에 나무열매로 머리통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드레스를 해 입혔지만 반응은 그저 그랬다. 나는 아직 만들어 보여주고 싶은 인형이 많았는데, 아이들은 이불 속에 누워있던 인형들을 죄 내게 안기더니 집으로 뛰어가 버렸다.

아이들에게 버림받은 채 혼자 숲길을 걸어보고 원두막에도 누워있어 봤지만 별 재미가 없었다. 멀리서부터 둥둥 북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가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플라스틱 통을 북처럼 두드려 장단을 맞춰가며 노래 부르고 어깨춤 추면서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농기구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다. 이미 거나하게 술이 취한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라오 위스키를 마셨다. 내게도 위스키를 따라 권했는데, 한 잔은 정이 없다고 꼭 두 잔을 연달아 권했다.

그들을 따라 마을로 돌아와 어느 집에서 같이 저녁까지 먹게 됐다. 메인요리는 새 구이였다. 안구가 뚫린 두개골과 쫙 뻗은 발 모양이 그대로 살아있는 작은 새였다. 손님을 대접하느라고 제일 큰 덩어리를 내게 권했다. 잠깐 망설이다가 한 입에 넣고 씹는 순간 나를 쳐다보던 좌중의 표정이 굳어졌고, 입 안에선 가느다란 갈비뼈가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모양 사납게도 도로 다 뱉어 뼛조각을 낱낱이 발라내야 했다.

그 중 한 아주머니가 영어를 조금 했는데, 길에서 만났을 때부터 내 손을 꼭 잡고 자기 손님이라면서 자기네 여관에 묵자는 얘기를 했다. 서 너 개의 영어단어로 된 그 말뜻을 잘 이해 못하기도 했지만, '오늘은 이미 정한 숙소가 있고, 내일도 이 마을에서 자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는 얘길 영어로 이해시킬 엄두가 안 나서 웃기만 하고 대답을 못했다. 아니, 실은 분명하게 거절하는 게 힘드니까 말이 안 통하는 걸 구실삼아 대답을 피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웃들이 그녀에게 숙소 얘길 해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뚱하게 고개를 젓기만 했다.

대접을 받기만 하고 답례를 못 한 게 영 서운해서, 파인애플을 사가지고 다시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들이 비슷비슷해서 어느 집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둑해져가는 동네를 헤매다가 농악대에 있던 애 업은 엄마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중심도로로 나가는 길을 찾는 줄 알고 손가락으로 그 쪽 방향을 가리켰고, 나는 아까 그 집을 찾은 줄 알고 그녀에게 파인애플을 건넸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파인애플을 받는 순간 그녀가 식사자리에 없었다는 게 떠오르면서 내가 엉뚱한 집 앞에 와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만 다시 파인애플을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내가 왜 자신에게 파인애플을 줬다고 생각했을까? 작은 마을이니 이웃들과 정황을 짜맞추다보면 내 의도가 전달될 수도 있을 거라고 위안하며 숙소로 향했다.

어두워지면서 여기저기서 춤판 노래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행 초기에 나는 조용한 마을들이 관광객으로 인해 소란해진 줄로만 알고 현지인들을 동정했는데, 오해도 그런 오해가 없었다. 볼륨을 최대치로 높이고 음악 듣기를 즐기는 건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들이었고 어두워지면 거기에 춤이 곁들여졌다. 숙소에 들어갔으나 밖에서 나는 음악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치 가라오케 방에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방에 있을 수가 없어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바로 옆 방갈로에서 동네 청년들이 음악을 나이트클럽 볼륨으로 틀어놓고 난리 브루스를 추고 있었다. 다가가 몇 시에 파티가 끝나는지 알고 싶다고 했더니, 8시에 끝내겠다고 했다. 8시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다음 날이라고 조용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다음 날도 파티를 한다고 하면 숙소를 옮겨야겠다고 결심하고, 파티 중인 방갈로에 다시 갔다. 이번에는 다들 자리에 앉아서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반색을 하며 앉으라기에 일단 앉았다. 내일도 파티를 할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모처럼 친구들이 모여 노는 거라고 했다. 맥주를 따라 권하기에 한 잔 마시며 음악을 듣는데, 80년대 한국가요 비슷한 노래들을 심장이 쿵쿵 울리도록 큰 소리로 듣는 게 꽤 괜찮았다. 방갈로 주인의 친구들은 어부고 사냥꾼이고 방갈로 직원이라고 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느라 긴 얘기가 오갈 틈은 없었다. 모였다하면 노래책 첫 장부터 끝장까지 합창을 하던 대학 때 생각이 났다. 그때처럼 그리고 그들처럼 나도 온몸의 소리를 쥐어짜가며 노래하고 싶었지만 가사를 몰라 아쉬웠다. 그날 밤 파장까지 남아있었던 건 오히려 나였다. 밖으로 나오는데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전망 좋고 운치 있는 것도 좋지만 구멍이 뻥뻥 뚫린 방갈로는 밖이나 다름없었다.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추운 날씨는 아니었는데, 추위에 대한 아무 대책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곳의 집들은 오직 더위를 날 목적으로 지어졌고, 그곳에서 추위는 피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었다. 몸이라도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근처에 있는 호아이센 마을과 반나 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가다보면 길 안내판이 있겠거니 했지만, 어디에도 안내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길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다가 논두렁과 개울에서 끊겨버렸다. 길을 물어보려고 해도 물어 볼 사람도 없었다. 개울 너머 초막이 보였다. 거기라도 가서 길을 물어보면 좋겠는데, 개울에는 징검다리 하나 없었다. 다들 맨발에 고무슬리퍼 차림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들고 개울을 건넜다. 강을 따라 여행한지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발을 물에 담그는 거였다. 초막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개울 상류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니, 부부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길을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호아이센과 반나 방향을 가리켰다. 서로 다른 방향이었다. 호아이센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다시 개울을 건너고 나서도 물기를 닦아내기 귀찮아 맨발로 걸었다. 그런데 발에 닿는 진흙이 어찌나 보드랍고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들은 또 얼마나 폭신폭신한지 나는 그만 행복해지고 말았다.

어쩌다보니 산중턱을 빙 둘러 깎은 황톳길로 접어들었다. 길을 잘 못 든 것 같아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서 경운기를 둘러싸고 십 여 명의 청년들이 다가왔다. 므앙느아에서 오는 길이라는 그들은 마침 호아이센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들은 새 탈곡기를 사서 경운기에 싣고 가고 있었는데, 경운기가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내리기 힘드니까, 청년들이 같이 다니며 오르막에선 경운기를 뒤에서 밀고 내리막에선 뒤에서 잡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을 걸어 호아이센에 도착하니 마을사람들이 몰려나와 같이 탈곡기를 내렸다.

호아이센에서 반나까지는 반나 사는 영어교사를 만나서 같이 갔다. 그런데 숙소가 있는 므앙느아로 돌아가는 게 문제였다. 적어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6시까지는 므앙느아에 도착해야 했다. 한 시간 거리라고 했지만, 안전하게 2시간 전에 출발했다.

므앙느아로 가려면 아침에 길을 잃었던 논두렁에서 개울을 건너야했다. 그러나 아무 표식도 없는 논에서 개울 건너는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마침내 문제의 장소에 다다랐다. 걱정했던 대로 어디서 개울을 건너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간 산 속에서 해가 질 수도 있었다. 어둠뿐인 그곳에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풀 수 없는 암호가 되어버린 논두렁을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개울 건너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붉은 길을 발견했다. 경운기를 끌던 호아이센 청년들을 만났던 길이었다. 청년들이 므앙느아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으니, 그 황톳길은 므앙느아까지 이어질 터였다. 수풀을 헤치고 개울을 건너 타잔처럼 뛰어서 황톳길에 다다랐다. 그런데 황톳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또 두 갈래로 갈라졌다. 나의 방향감각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나의 방향감각에 의지해 따라간 길 끝에는 다시 광막한 논이 기다리고 있었다. 망연하게 서있는데 홀연히 사냥꾼이 나타나 길을 가르쳐줬다. 탕탕 총소리를 들으며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춤판 노래판이 벌어진 떠들썩한 마을길을 걸어가는데 나는 벌써 마을에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연신 “사바이디!”를 외치며 숙소로 향했다.

므앙느아는 활기차고 정답고 사랑스런 마을이었다. 춥지만 않았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그 마을에 있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무 추워서 시멘트벽으로 단단히 막힌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사실 마을에는 제대로 지은 고급숙소가 있었다. 그리로 옮길 수도 있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길에서 농악대 일원이었던 여관주인과 계속 마주쳤다. 그녀의 춥고 허술한 방갈로로 옮기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트렁크를 끌고 제3의 숙소로 옮기기도 그랬다. 이런 저런 게 다 불편해진 나는 므앙느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므앙크아행 배표를 사러가는 길에도 어김없이 그녀와 마주쳤다. 그런데 그녀도 므앙크아에 간다는 게 아닌가.

우리는 같은 보트를 타지는 않았다. 내가 탄 건 외국인 관광객을 태운 퀵보트였는데, 그녀는 슬로우보트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빨간 머플러를 쓴 그녀의 옆에는 아이와 남편인 듯 보이는 남자가 같이 있었다. 배가 나루터를 떠날 때 그녀에게 손이라도 흔들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이를 챙기느라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므앙크아에 가까워지자 강에서 자갈 채취하는 기계가 돌아가고, 중장비들이 산중턱에 길을 내고, 강 위엔 크고 높은 다리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우기마다 쓸려 내려가는 대나무 다리 대신 오래 오래 쓸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세우고, 경운기가 이동할 때마다 장정 10명이 달라붙어야하고 아이들이 등하교 때마다 40분씩 걸어 다녀야하는 길 대신 차와 자전거가 씽씽 달릴 수 있는 길을 닦는 거였다.

그러나 시뻘겋게 파헤쳐진 그 길은 짐승의 상처처럼 참혹했다. 나는 생각했다. 경운기를 밀고 끌던 청년들은 즐거워보였고, 그들은 마을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길이 닦여 경운기 혼자 그 일을 하게 되면 청년들의 역할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게 되겠지만, 도시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저임금과 실업일 가능성이 높다.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친구들과 같이 걷는 등하교 길처럼 즐거운 시간이 또 있을까. 나는 늘 그 길이 너무 짧아서 아쉬웠다. 길이 좋아지면 학생들은 자전거로 또는 부모의 차로 빠르게 그 길을 오가게 될 테지만, 빨리 집에 가봐야 혼자 게임을 하거나 학원을 전전하게 될 뿐이 아닐까.

그러나 나 자신 난방시설이 없다는 이유로 므앙느아를 탈출해 나온 게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남들에겐 불편을 감수하라고, 그게 더 나은 삶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다니. 대학시절 남자선배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자기가 담배를 피워서 아는데, 담배는 몸에 나쁘고 여자 몸에는 더욱 나쁘니 피지 말라고 틈만 나면 여자후배들에게 설교하곤 했다. 물론 선배들 자신은 담배를 끊지 않았을 뿐 아니라 끊을 마음도 없었다. 그런 심보를 같잖게 여겼으나 나도 다를 게 없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은 조금도 포기하려들지 않으면서, 약자에게는 욕망을 포기하라고 들볶고 강요한다. 위해주는 척 같잖은 당위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그렇게 여자들은 착하게 일부종사하고, 아이들은 착하게 공부만 열심히 하고, 휴가지 라오스에선 사람들이 착하게 전통적 방식을 지키며 살아가는, 나 보기에 좋을 세상을 강요하느라 핏대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그 누구도 나보기 좋으라고 살지는 않는다.

다섯 시간 만에 베트남과의 국경도시 므앙크아에 도착했다. 언덕을 따라 집들이 강을 굽어보고 있는 마을이었다. 우체국도 있고 피씨방도 있고 시장도 있는 그 마을이 심심산골에서 온 내 눈엔 도회지처럼 번화하게만 보였다. 길에는 소수족들이 많았다. 소수족들은 물레로 짠 전통의상을 입고 머리엔 높은 모자를 썼는데, 새빨간 술이 드리워진 모자를 쓴 모습은 탄성이 나오도록 멋지고 위엄 있었다. 그러나 전통의상을 제대로 갖춰 입고 다니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통치마에 패딩점퍼를 입고 털모자를 쓰는 식으로 간소화된 차림새가 대부분이었는데, 패딩점퍼며 털모자가 위엄 있는 전통의상과 대비돼 한결 후줄근해 보였다.

소수족들은 금장신구를 즐겨서 다들 금귀고리며 금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작은 금은방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다가가보니 금은방 주인은 국수집에서 봤던 남자였다. 나는 국수집에서 한쪽 얼굴이 주저앉은 그를 피해 멀찌감치 앉았더랬다. 그런데 금을 세공하던 그가 나를 보고는 싱긋 웃는데, 인상이 좋았다.

그는 금귀고리를 세공 중이었다. 그가 쌀알만 한 금덩이를 망치로 탁 쳐서 납작하게 만들더니 가스불로 달구기 시작했다. 삼파장 등으로 환하게 밝힌 작업대 위에는 각종 세공 장비들이 놓여있었다. 빨간 벽돌 두 개, 플라스틱 바께쓰, 삼발이에 놓인 대야, 유리병들, 낚싯줄, 숟가락, 이쑤시개, 라오위스키......평범하게만 알던 그 물건들이 금세공 도구로 변신해 벌이는 활약을 보고 싶어 조바심이 났는데, 남자는 작업을 중단하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미처 못 본 물건들의 활약을 보려고 금은방엘 다시 갔다. 이번에는 남자는 없고 여자 세공사가 금귀고리를 세공 중이었다. 여자는 나의 시선을 불편해했는데, 나는 숟가락과 이쑤시개와 빨간 바께쓰가 펼칠 변신의 무대를 보겠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있었다. 나 때문이었을까? 그것들이 무대에 설 새도 없이 여자는 진열장에 전시했던 장신구들을 가방에 담으며 문 닫을 채비를 했다. 금은방을 나서며 여자세공사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라오스에서의 마지막 밤엔 후회가 가득했다. 므앙느아의 여관주인도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녀도 므앙크아 어딘가에 있을까? 마음이 괴로워 강가로 걸어 내려갔다. 어둠이 내린 강가에선 이름 모를 양서류가 꼬르륵 꼬르륵 배고픈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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