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여행 10화
베트남에 온지 15일이 다 돼 갔다. 디엔비엔푸 국경에서 15일짜리 입국도장을 받았기 때문에 베트남에 더 있으려면 입국도장을 다시 받아야했다. 제일 가까운 국경도시 라오바오에 가기로 했다. 버스는 라오바오를 지나 라오스의 시사나켓까지 간다고 했다. 더 이상 베트남에 있고 싶지 않았기에, 이참에 라오스로 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온갖 이유를 들어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서둘러 떠나왔기 때문에 여행의 절반 이상을 베트남에서 체류하게 된 거였다. 떠나야 할 모든 이유들이 사실은 떠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라오바오까지 가는 내내 비와 안개가 이어졌다. 그런데 라오바오에 도착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쾌청했다. 모처럼의 맑은 날씨를 만끽하며 출입국관리소 창구 앞에 서있자니,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새치기를 했다. 급할 게 없었던 지라 멀찌감치 물러서서 바나나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버스를 타고 온 백인 청년이 옆에 서더니 새치기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주의를 줘 뒤로 보냈다. 나한테도 자기 순서는 자기가 지켜야 된다면서 자기가 나서서 내 여권을 창구 안에 밀어 넣었다. 직원이 여권을 돌려주면서 1달러의 수수료를 요구했지만 그는 손을 흔들어 거절했다. 그러자 직원은 별 말 없이 여권을 돌려줬다. 여권을 받아들고 돌아서면서 그는 수수료를 요구하는 건 불법이라면서 아는 체를 했다.
버스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백인이긴 해도 서구인들과는 옷차림새와 태도가 다르다고 느꼈는데, 그는 러시아인이었다. 한국이 후진국이던 시절에 성장한 나는 선진국 사람들의 지나치게 곱고 예의바르고 세련된 태도가 편치 않다. 그런데 한국이 잘 살게 된 이후론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게 된다. 나는 러시아 청년이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걸 단박에 알아보았고, 그에게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못 느껴본 동질감을 느꼈다.
러시아 청년은 입국도장을 받아 떠났지만, 나는 날씨 좋은 라오바오에 남기로 했다. 국경도시답게 여관이 많았다. 처음에 들어간 여관은 식당을 겸한 곳이었다. 주인이 식당일이 바빠서 나 혼자 방을 보러 갔다. 그런데 방 청소가 안 돼 있었다. 주인에게 얘길 하니 다른 방 열쇠를 줬다. 그러나 다른 방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얘길 하니, 이번에는 일하는 여자가 따라왔다. 여자는 이 방 저 방 들어가 보더니 나더러 그 중에 한 방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들어가 보니 화장실에 전 손님이 쓰다버린 비누포장이며 수건이 그대로 있었다. 그걸 가리켰더니 여자는 그것들을 주워들고는 이제 됐으니 들어가라고 했다. 내가 청소하는 시늉을 해보였더니 여자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안 되겠어서 그냥 나오는데, 여자는 화가 단단히 나서 주인에게 큰 소리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근처의 다른 여관에 갔다. 여관엔 그 날 제사가 있는 것 같았다. 부엌에서 여자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해 날랐고, 응접실에선 노란 비단옷을 차려입은 노인이 지방을 썼다. 대가족이 모여 사는 가정집 분위기가 나쁘지 않기도 했지만, 가까이서 제사구경을 할 욕심에 그곳에 묵기로 했다.
숙박비를 물었다. 여관 주인은 숙박비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를 선뜻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영어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퀴즈문제를 푸는 아이처럼 몰두했다. 그가 답을 찾기를 기다리다 나는 그의 어깨 위에서 크고 붉은 개미를 발견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그의 어깨를 툭툭 쳐보았지만, 개미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손동작이 점점 거칠어졌지만, 그는 그것을 전혀 못 느끼는 것처럼 내 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생각에만 몰두했다.
사회마다 신체접촉에 대한 민감성에 차이가 있다. 대학 때 어학원에 불어를 배우러 다녔다. 그때 프랑스인 강사가 한국인들은 길에서 어깨를 세게 부딪쳐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면서 경멸조로 말했다. ‘사람 많은 데서 부딪칠 수도 있지 그게 뭐 대수라고.’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 프랑스에 가게 됐는데 과연 프랑스인들은 몸이 스칠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새 한국인들도 서구식 예절이 몸에 배서 살짝만 스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됐다. 여관주인이 나의 손동작을 아예 못 느끼는 듯이 구는 걸 보면서 웬만한 신체 접촉쯤엔 무신경하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다.
마침내 여관주인이 만족스런 얼굴로 “나인!”하고 외쳤다. 내가 잘 알아듣고 10달러를 주면서 거스름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뭔가 잘 못 된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번에는 손가락 마디를 이용해 영어로 1부터 10까지 천천히 세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나도 개미를 떨어뜨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가 “텐!”하고 소리쳤을 때 개미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계산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방 모서리 한 가운데 담배꽁초가 놓여있었다.
국경도시들은 큰 역 주변과 비슷했다. 뜨내기들을 상대하는 상권이 중심이라 거칠고 산만하고 안정감이 없었다. 출입국 관리소 옆으로 목조 가옥들이 보이기에 올라가 보았다. 마을은 황폐했다. 길바닥에는 쓰레기들이 널려있었고, 벽이며 천정이 떨어진 채 방치된 흉가 같은 집에는 땟국이 줄줄 흐르는 아이들만 남아있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가시철조망이 마을 분위기를 한결 험악하게 했다. 나뭇더미에 앉아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무슨 얘길 해보려다가 말이 안 통하니까 큰 소리로 다른 사람을 불렀다. 잠시 후 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는 내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가 내게 베트남에서 왔는지 라오스에서 왔는지를 묻는 것 같아서 베트남에서 왔다고 하니까 숙소를 묻더니 헬멧을 주면서 오토바이 뒤에 타라고 했다. 걸어서 나가겠다고 했더니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토바이는 무서운 속도로 산길을 달렸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그에게선 술 냄새가 났다.
다낭 가는 버스시간을 알아보려고 터미널에 갔다. 텅 빈 터미널을 젊은 직원 혼자 지키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안으로 부르더니 의자를 권하고 과자를 내왔다. 과자접시에는 이미 과자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그는 과자를 더 꺼내 수북이 담아서 권했다. 필담으로 다낭 가는 차 시간을 알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어려웠다. 날이 저물며 바람이 거세지더니 높은 창문 너머로 나뭇가지가 휘청거렸다. 바람 소릴 들으면서 잘 생긴 청년과 마주앉아있는 게 나쁘지 않아서 좀 더 그렇게 있고 싶었는데, 그가 숙소까지 오토바이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걸어서 가겠다고 했더니, 그는 날씨가 춥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라오바오에서 나는 자꾸만 오토바이에 태워졌다.
오토바이를 타고 여관에 돌아오니 여관마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새 차를 산 것 같았다. 차 앞에 음식을 산처럼 차려놓고 비단 제복에 화려한 관을 쓴 노인 둘이 종을 치며 타령 같은 노래를 불렀다. 제사가 끝나자 식구들이 삥 둘러앉아 제사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나도 같이 앉아 먹게 됐는데, 제사 음식이란 게 차고 딱딱해서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다.
아침에 차 마실 물을 달라고 했더니, 일하는 아주머니가 주전자를 들고 굳이 방에까지 따라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세면도구가 든 비닐봉지를 열어보고 트렁크에 든 물건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하는 양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노크도 없이 다시 들어와 비질을 시작했다. 비질을 하다가 내게 뭔가를 물었는데, 체크아웃 시간을 물어보는 것 같아서 손목시계의 12시를 가리켜보였다. 아주머니가 나가고 나서 보니 방 모서리에 놓여있던 담배꽁초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멀리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전날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출입국관리소와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개점휴업상태인 쇼핑몰, 무역센터, 고무공장을 지나자 눈앞에 예쁘고 정갈한 마을이 펼쳐졌다. 햇빛 아래 집과 나무와 사람들이 모두 반짝반짝 빛났고, 훈풍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날씨가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자마자 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다. 다른 곳에 간다고 해서 채워질 갈증이 아닌 줄을 잘 알기에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쉽지 않았다. 그러다 버스 출발 시간이 지나버렸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고 나서야 마음에 평화를 찾았다.
마을 초입의 카페에 들어가 긴 처마가 만드는 시원한 그늘에 앉았다. 거기 앉아있으면 동네사람들을 다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여관집 노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소수족들이 소떼를 몰고 지나가기도 했다. 뿔에 붉은 스프레이 칠을 한 소들은 당나귀 같은 귀에 구름 같은 목젖을 가슴까지 드리우고 등에는 낙타처럼 혹이 달린 이상한 생김새였다. 그 다음엔 엄청나게 큰 뿔을 가진 물소 떼들의 행렬이었다. 나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 보고 싶어졌다. 저만치서 소수족 무리가 나물 캐는 바구니를 들고 다가오는 게 보이기에 서둘러 계산을 하고 그들을 쫓아 나섰다.
소수족 무리를 따라 양옥주택을 지나 목조가옥이 늘어선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입구에는 일주문 같은 문이 서있었는데, 뒤돌아보니 재활용 함석으로 된 문의 뒷면에 위험을 경고하는 해골바가지 사인이 그려져 있었다. 함석의 뒷면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 원래 문양이 그대로 드러난 것뿐이지만 이후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나자 그 해골바가지가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는 의미심장한 경고로 여겨졌다.
소수족 무리는 마을 어귀에서 뿔뿔이 흩어졌지만 나는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집들은 라오스 시골과 비슷했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다들 나를 쳐다볼 뿐 아무도 인사하지 않았다. 먼저 “신짜오(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도 대꾸조차하지 않았다. 가다보니 나루터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특별히 강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나루터가 있으면 꼭 내려가 보게 됐다. 폭이 좁은 강을 뗏목 한 척이 오가며 오토바이 탄 남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배에 탄 남자가 계속 나를 쳐다보기에 “신짜오!” 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는 내가 베트남어를 할 줄 아는 줄 알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마을로 올라가는데 내려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초소가 있었다. 거기서 한 남자가 손짓을 했다. 카키색 옷을 입은 걸 보니 경찰인 것 같았다. 다가가니 강 너머가 라오스라서 거기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여권을 보여 달라는 것 같아서 건넸더니 살펴보고는 돌려주는 게 아니라 자기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나서 나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마을입구의 초소로 데려갔다.
그쪽 초소에 있던 경찰이 내 여권을 받아들더니 안으로 들어가 넥타이를 매고 제복 상의를 갖춰 입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사안의 심각성을 눈치 챘다. 제복 입은 경찰이 나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웠다. 오토바이는 마을을 빠져나가더니 내가 왔던 길을 거슬러 고무공장과 무역센터 그리고 내가 묵는 여관을 지났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오토바이는 출입국관리소에 있는 경찰서로 들어갔고, 나는 여권과 함께 그곳 경찰에게 인계됐다. 경찰은 잠겨있던 별채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여권에 적힌 걸 공책에 옮겨 적었다. 서류작업이 끝나자 그는 내 가방을 열게 해서 안에 든 물건들을 하나씩 살폈다. 이어서 모자와 주머니와 속옷에 감춘 것이 없는지 차례로 확인하더니, 마지막으로 팔뚝에 주사자국이 있는지 살폈다. 조사를 끝낸 그는 나를 마당의자에 앉혀놓고 여권을 가지고 어딘가로 갔다. 가면서 손가락을 한 바퀴 휙 저어 내가 앉아있는 자리를 가리켰는데, 자기가 돌아오겠다는 건지 또 누가 와서 나를 데려갈 거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없는 사이에 그냥 경찰서를 걸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권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국경을 넘는 것은 물론이고 여관에 투숙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여권이 필요했다. 한참 만에 그가 다른 경찰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들은 멀찌감치 서서 내 여권을 보면서 얘기를 나눴다. 잠시 후 사복 차림의 여자가 마당으로 들어오더니, 내게 다가오면서 “Hello!”하고 인사를 했다. 나를 조사하기 위해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부른 것이다. 그녀가 물었다.
“강가에서 누가 봤다던데 거기서 뭘 하고 있었나요?”
“그냥 강을 보고 있었어요.”
“그 너머가 라오스예요.”
“나는 강을 건너가지도 않았어요.”
“여기는 국경도시고 당신은 외국인이라 국경 근처에 있으면 안 됩니다.”
“몰랐어요.”
“묵는 여관이 그 근처인가요?
“아니요. 그냥 걸어 다니다 거기까지 가게 됐어요.”
“언제 라오바오를 떠날 건가요?”
“원래는 내일 떠나려고 했는데 차만 있으면 오늘 당장 떠나고 싶어요.”
그녀가 경찰들에게 다가가 말을 전했다. 잠시 후 담당 경찰만 남고 모두 돌아갔다. 담당경찰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여권을 건네며 손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떠나야할 충분한 이유가 생겼으니 당장 라오바오를 떠나기로 했다.
다낭행 정규버스는 끊겼지만 미니버스가 있었다. 미니버스는 깎아지른 산길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나갔다. 다낭까지 가는 길은 험한 지형과 궂은 날씨 코스로 되어있는 죽음의 자동차 랠리 같았다. 라오바오를 떠나자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금세 흐려지더니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라오바오 가는 길에 만났던 바로 그 안개였다. 안개는 마치 산과 마을처럼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안개가 흘러드는가 싶더니 안개는 곧 지척을 구분하기 힘들만큼 짙어졌다. 놀랍게도 버스는 그 새하얀 어둠 속에서도 추월을 멈추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역시 라오바오 가는 길에 만났던 그 비였다. 비 때문인지 굽이굽이 산길에 커다란 돌들이 떨어져있었다. 차가 떨어진 돌들을 피해 갈지자로 달렸다. ‘낙석주의’ 경고판을 볼 때마다 의아했었다. 돌이 언제 떨어질 줄 알고 주의를 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 길에서 ‘낙석주의’가 떨어지는 돌이 아니라 떨어진 돌을 주의하라는 경고인 줄을 알게 됐다.
낙석구간이 끝나자 버스가 제 속도를 되찾으면서 진정한 죽음의 레이스가 시작됐다. 버스는 차선이 하나밖에 없는 도로에서 앞서가는 차량을 추월하기 위해 계속 중앙선을 넘었다. 빗속의 커브 길이었다. 마주 오는 차량과 부딪칠까봐 겁이 나 간이 졸아들었다. 도대체 몇 킬로로 달리나 계기판을 봤더니, 계기판은 고장 나 멈춰있었다. 안전벨트도 없었다. 기사는 운전하는 틈틈이 앞 유리까지 닦고 있었다. 살아서 차에서 내리고 싶었기에 기사의 손에서 걸레를 뺏어 앞 유리 닦는 걸 자청했다.
중간에 다른 미니버스로 갈아탔다. 그러나 운전기사가 바뀌어도 운전 스타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버스가 중앙선을 무시하고 갈지자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서 도로의 팬 곳을 피해 그렇게 운전하는 거였다. 어느새 깜깜한 밤이었다. 다른 승객들은 모두 잠들어있었지만, 나는 긴장한 나머지 한시도 전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응시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버스 안에서 나는 내 운명이 잃어버린 시계의 그것만큼이나 우연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낭에 도착한 건 밤늦은 시간이었다. 다낭은 생각보다 큰 도시였지만 둘러보지 않고 바로 호이안으로 가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트렁크를 끌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에 타기 전에 커피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서너 군데의 카페에 들어가 보고 나서 그 중 한 곳을 정해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점원이 커피를 가져오며 주문을 하고 어딜 갔다 오느냐며 따졌다. 가격을 물어봤을 뿐 커피를 시킨 적은 없다고 했더니, 점원은 화를 내며 커피를 도로 가져가버렸다. 점원은 시종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조금도 숨기려들지 않았는데, 서울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그 카페에서 그녀의 태도만이 신선하게 낯설었다.
예전엔 우리나라 상인들도 무뚝뚝했다. 손님과 욕설하며 싸우는 모습도 흔했다. 손님이 왕이 되는 데는 삼성전자서비스가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면 이전에 경험해본 적 없는 종류의 친절한 안내를 받게 됐다. 안내원들은 미스코리아처럼 높고 고운 음성으로 노래하듯 말하면서 손님을 왕 대접하기 위해 극존칭을 썼다. 그런데 손님에게뿐 아니라 물건에도 존칭을 붙였다. “고객님, 그 제품은 품절되셔서요.” “세탁기가 중간에 동작을 멈추신다고요?” 나는 이 존칭사용법에 크게 당황했다. 어릴 적 들은 다음과 같은 우스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배운 것 없고 무식한 딸이 시집을 가게 됐다. 걱정이 된 아버지가 시아버지에게 말을 할 땐 무조건 단어 끝에 '님'자를 붙이고 문장 끝에는 '...십니다'를 붙이라고 가르쳤다. 그랬더니 딸이 시집가서 시아버지 머리에 검불이 붙은 걸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아버님 대갈님에 검불님이 붙으셨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물에 존칭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짓이라고 배웠고, 나이 들도록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미스코리아처럼 고상한 음성으로 물건에 존칭을 붙이다니 당황스러울밖에. 그 후 세계 일류기업 삼성의 서비스정신은 동네 빵집에까지 영향을 주어 온 나라의 상인들이 물건에 존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리말이 무식해지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러나 말이란 변하는 세상을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물건에 존칭하는 것은 물신사회에서 물건의 높아진 지위의 반영일지 모른다.
고등학교 때 남대문시장에서 머리핀 가격을 물어보기만 하고 안 샀다가 주인에게 파리채로 맞은 적이 있다. 물건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그 물건을 사는 손님의 지위도 같이 높아져서 더 이상 그런 불쾌한 경우를 당하지 않게 됐다. 그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판매원들은 고용주의 눈치를 보며 손님을 모시느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기이한 상태를 강요받게 됐다. 베트남 사람들의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태도가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자기감정을 아무 억압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 한 구석으론 통쾌하고 부러웠다.
결국 커피를 못 얻어먹고 다낭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