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여행 9화
베트남 국경을 넘자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무가 우거진 산 대신 산 전체를 깎아 개간한 산 모양의 밭들이 이어졌다. 작물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격자무늬 밭들은 땅 위에 그린 거대한 그림 같았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지나며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손바닥만 한 경작지가 낯설고 의아했는데,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경작지를 보고서야 두 나라가 농사 보다는 농사 이전의 수렵 채취, 어업, 가내수공업에 의존하는 사회라는 걸 이해했다. 건축양식도 달라졌다. 대나무 벽에 이엉을 엮은 지붕 대신 흙벽에 기와를 얹은 낯익은 집들이 등장했다. 곳곳에 무덤도 보였다. 우리처럼 중국문화의 영향이었다. 인도문화의 영향권인 캄보디아 라오스와는 달리 베트남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겪어보니 베트남인들은 캄보디아나 라오스인들과는 달리 행동이 빠르고 근면한데, 그것도 유교의 영향일 거라고 짐작했다.
버스는 산악지대인 디엔비엔푸를 달렸다. 디엔비엔푸는 1954년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에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베트민은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가이드북에는 베트남의 역사가 소상히 소개돼 있었다. 베트남 역사는 우리와 상당히 비슷했다. 우리가 몽고, 일본, 미국에게 침략 당했을 때, 베트남도 몽고, 프랑스, 미국에게 침략 당했다. 그러나 우리가 번번이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였던데 반해, 베트남은 모든 침략자들과 싸워 매번 마침내 승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은 12세기 칭기스칸의 몽고군을 대파했으며, 1954년 프랑스에 승리했고, 남베트남 해방전쟁을 통해 1975년 미국을 몰아내고 베트남 통일을 이루었다. '만약'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우리 역사의 이본을 읽는 것 같았다.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승리 그 자체보다 더 부러운 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끝까지 싸워 이겨냈다는 자부심이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과 불평등한 관계인 까닭에 한국에선 반미투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반미를 외치면서도 미국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희미한 믿음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미국과의 싸움에서 나를 가로막는 건 미국이 아니라 ‘약소국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거대한 체념이다. 어찌된 셈인지 우리사회는 ‘약소국’ 운운을 가장 합리적인 자기 인식으로 여기는 분위기이고, 나 역시 약소국민으로서의 패배의식이 골수에 찌들어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패배의식에 갇힌 자신을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위해 나는 ‘약소국’ 운운하는 주장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 단 한 번의 승리에 목말라했다. 그런데 내가 몰랐을 뿐 그 주장이 개소리라는 걸 자신들의 역사로 증명한, 체념이라곤 모르는 용감한 이웃이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버스는 풍금 건반을 치듯 경적을 울리며 디엔비엔푸 시내로 향했다. 경적소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부릉부릉 버스가 나갑니다, 조심하세요. 저기 가는 자전거, 물소, 누렁개, 우물쭈물하다가는 큰 일 납니다.’ 처음 도착한 호찌민에서 경적소리는 나를 서둘러 도망치게 했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온 디엔비엔푸에서 나는 그것을 친절한 안내방송으로 듣고 있었다. 시내로 접어들자 거리엔 빨간 플랭카드가 리본처럼 펄럭였다. 음력설을 맞아 가게들마다 세수용품을 팔고 있었다. 붉은 색과 황금색의 장식들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하고 멋졌다.
하노이까지 가는 길엔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금귤이 가득달린 금귤나무와 분홍 꽃이 활짝 핀 복숭아나무를 싣고 가는 오토바이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베트남에선 설에 금귤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집안에 두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하노이에 도착하니 집집마다 금귤나무와 복숭아나무가 놓여있었고 그 옆엔 꽃, 과일, 부적을 쌓아올린 화려한 제상이 차려져있었다. 처음 호찌민에서 오토바이를 피해 뒷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거기가 미아리 점집 골목 같은 곳인 줄 알았다. 집집마다 집 안에 제단이 차려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베트남에선 어느 집이나 가장 중심이 되는 자리에 조상신의 제단을 모셨다. 평소에도 제단에 드리는 정성이 보통이 아니니,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의 제상 차림은 그야말로 볼만했다. 나는 집집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제상차림과 세수장식을 구경하며 늦도록 돌아다녔다.
설 명절은 일주일이나 됐고,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아침부터 카페에서 입장권과 영수증을 정리하고 가계부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맞은편에 앉은 독일인 칼도 나처럼 공책에 영수증을 붙이고 있었다. 나처럼 베트남에서 산 공책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와 설 연휴를 어떻게 보낼지 의논하게 됐다. 그가 자정에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하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불꽃놀이에 별 흥미가 없는데다가 워낙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 자정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하노이까지 와서 카페에만 있다 가서야 되겠냐며 조르는 바람에 약속을 하고 말았다.
저녁 7시에 불꽃놀이가 있는 호안끼엠 호숫가에서 칼을 만났다. 그런데 어쩌자고 약속시간을 그렇게 일찍 잡았던 걸까? 자정까지는 무려 5시간이 남아있었다. 잘 차려입고 나온 청춘남녀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호숫가를 돌았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호숫가를 돌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춘남녀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났지만, 술 마시는 이, 고성방가 하는 이 하나 없이 모두 얌전하게 호숫가를 돌고 또 돌뿐이었다. 술주정뱅이들의 나라에서 온 칼과 나는 그들의 절도 있는 태도가 의아하기만 했다. 호수를 몇 바퀴나 돌았을까. 11시가 넘자 칼이 피곤하다면서 그만 들어가겠다고 했다. 참 의리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린 게 아까웠던 나는 혼자 남아 영원 같은 30분을 견뎌야 했다. 마침내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그런데 불꽃놀이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없었다. 중간에 가버리고도 싶었지만, 그 많은 인파를 뚫고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15분간이나 계속되던 불꽃놀이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민통호텔에 묵었다. 여관비엔 아침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설 연휴라 식사 준비할 사람이 없다면서 아침을 한 번도 안 줬다. 사장이 그런 사정을 몰랐을 리 없으니, 그는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한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에게 하롱베이 투어를 산 내가 바보였다. 그는 설 연휴엔 하노이에 있어봐야 아무 할 일이 없다면서 하롱베이 투어를 권했다. 그러나 설 연휴엔 하롱베이 투어 관계자도 일을 안 했다.
하롱베이 투어를 떠나던 날 아침, 길에 서서 버스를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 누군가 버스기사가 고향에서 차례를 지내고 올라오나 보다는 농담을 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약속된 버스는 끝내 오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급조된 두 대의 미니버스에 나눠 타고 하롱시로 가게 됐다. 나는 먼저 출발한 버스에 탔는데 하롱시에 도착해보니 인솔자가 아무도 없었다. 버스운전사와 관광객들이 모두 각자의 언어로 아우성치는 속에서 같이 우왕좌왕하다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트렁크를 깔고 주저앉으니, 그제야 가이드가 탄 후발 버스가 도착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도착한 항구에는 또 다른 관광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는 관광객들을 투어일수와 잠 잘 장소에 따라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명단을 가지고 차례로 이름을 불러 체크하는 손쉬운 방법 대신, 손가락으로 머릿수를 세고 또 셌다.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 걸린 끝에 나는 배에서 잘 사람으로 분류됐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점심을 먹고 동굴에 갔다. 가이드가 이 종유석은 사자 갈기, 저 종유석은 코끼리 코, 그러면서 닮은 꼴 찾기를 했는데 비슷하지도 않은 데다 바보짓이었다. 그나마도 그게 그날의 유일한 프로그램이었다. 동굴에서 나오자 카약을 했는데, 배가 모자라 먼저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해가 지고 말았다. 내 투어에는 카약비용 5달러가 포함돼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루 일정이 끝나자 다시 관광객을 모아놓고 머릿수 세기가 시작됐다. 나는 이번에는 여관에서 잘 사람으로 분류됐다. 여관에 도착한 뒤 다시 누구와 어느 방을 쓸 것인지에 관한 긴 분류 끝에야 마침내 정해진 방에 짐을 풀 수 있었다. 그런데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내내 프런트에서 한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추가비용을 내고 1인실을 예약했는데 2인실을 줬다는 항의였다.
둘째 날 아침식사로는 차가운 식빵 4개와 새끼손가락 마디 하나 만큼의 쨈과 버터 그리고 차가 제공됐다. 식사 중간에 버터와 차가 모자라 더 달라고 했더니 영화감독 김조광수 닮은 여관주인이 추가요금을 내라고 했다. 맨 빵을 억지로 씹어 삼키고 서둘러 로비에 집합했다. 8시에 트래킹을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버스가 안 왔다면서 12시까지 자유 시간이라고 했다. 빗길에 덜덜 떨면서 뒷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시간 맞춰 여관에 돌아갔더니, 가이드는 아직도 버스가 안 왔다면서 3시까지 자유시간을 연장하겠다고 했다. 다 그놈의 설 명절 탓이었을 뿐 가이드에겐 아무 책임이 없었으므로 가이드는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다른 관광객들과 같이 근처 카페로 몰려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모두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우리가 묵었던 여관에선 와이파이도 안 터진다는 불평을 시작으로 투어에 대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알고 보니 전날 밤 1인실을 요구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웬일로 여관 측에서는 선뜻 1인실을 내줬는데, 새벽 3시에 만취한 가이드가 자기 방이라면서 들어와 자더란다. 만취한 베트남인을 볼 기회를 놓치다니 아쉬웠다. 호주인은 호주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우리가 먹은 식재료들의 신선도를 의심했고 우리가 탔던 버스와 배와 부두의 안전성을 문제 삼았다. 그의 나라 기준대로라면 그 투어는 물론 베트남 자체가 불법일 터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나라의 무사안전이 권태로웠던지 내심 그 상황을 즐기는 눈치였다. 실은 나도 그랬다. 투어가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좋았겠지만, 어긋나면 어긋나는 대로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엉망진창 투어 구경이 하롱베이 섬 구경만 못지않았던 것이다.
투어에 대한 성토가 계속됐다. 홍콩인들 셋은 투어비 65달러에 원숭이섬 입장료를 6달러씩 더 냈는데, 설 연휴 동안 원숭이섬이 휴무라며 불평했다. 그 얘길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원숭이섬 때문이 아니라 투어비 때문이었다. 나는 투어비를 무려 110달러나 냈는데, 확인해보니 그 자리의 대부분이 65달러를 냈다고 했다. 이런 거지같은 투어를 바가지까지 쓰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불평하는 걸 팔짱 끼고 지켜보던 나는 돈 문제가 걸리자 평정심을 잃었다.
그날 트래킹을 하기는 했다. 가이드는 산 밑 휴게소까지만 데려다주고, 거기서부터는 외길이니 우리끼리 알아서 갔다 오라고 했다. 종일 내린 비로 진흙탕이 된 산길은 미끄러웠다. 가파른 바위산이었고 바위 하나하나가 하롱의 섬들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산꼭대기에는 에펠탑 같이 생긴 전망대가 있었는데, 나는 베트남 철골물을 신뢰할 수 없어서 안 올라갔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는데, 산에 안 가고 휴게소에서 맥주를 마시던 호주인은 자기 나라에서는 이런 날씨 이런 시간에 가이드도 없이 산에 올라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한 번 정해진 게 그대로 지켜지는 일은 없었다. 그 날 밤도 어디서 잘지 결정이 번복되면서, 이 배에서 저 배로 옮겨 다녀야했다. 세 번째 배에서 만난 독일여자는 그날 하루 동안 자기가 옮겨 다닌 투어 그룹이 세 갠지 네 갠지 헛갈려했다. 그녀는 독일의 추위를 피해서 왔는데 아직 따뜻한 곳을 못 찾았다면서 웃었다. 그녀와 룸메이트가 될 줄 알았지만 다른 사람과 룸메이트가 됐다. 방을 정하고 나서야 저녁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식사 시간이 지난 지 오래라 몹시 배가 고팠다. 스탭들 음식이 먼저 나왔다. 닭튀김, 고기 조림, 생선구이 등이 푸짐해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같은 메뉴가 나올 줄 알았지만 우리 식탁에 차려진 건 오이무침, 양파무침, 삶은 양배추, 계란탕과 계란말이였다.
마지막 날 아침식사를 하다가 차를 더 마시고 싶어서 종업원을 불렀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식사 중이었는데, 충분히 들릴 만큼 큰소리로 여러 차례 불렀는데도 돌아보질 않았다. 나중에는 다른 관광객들이 같이 합창을 해주었고, 그와 합석한 선장도 말을 전하는 눈치였지만, 그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한 관광객이 일어나 대신 서빙을 했다. 내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 때 쯤, 종업원도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 차를 서빙하기 시작했다.
선실 벽에는 선실규정이 빽빽하게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자기들은 아무 것도 안 지키면서 상대방에겐 참 요구하는 것도 많았다. 8시 반이 체크아웃 시간이었는데, 종업원이 8시 20분부터 빨리 나오라고 방문을 두드리며 돌아다녔다. 차를 달라고 했을 때 못 들은 체하던 바로 그 종업원이었다. 나는 지난 이틀 간 기다린 것 밖에 한 일이 없는데 그들은 매번 나를 재촉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재촉쯤은 무시하는 게 그들의 방식이라면 나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파란 바다 위에 떠있는 섬들이 네모난 선창에 그림처럼 걸려있었다. 선실문을 닫고 침대에 앉아 그 고요한 풍경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하노이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한국인과 옆자리에 앉게 됐다. 모국어로 투어를 성토하니 한결 속이 시원했다. 그는 삼성전자 하노이 공장에 근무하는 관리직 직원이었는데 공장에선 도난이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잠깐만 한 눈을 팔면 공구가 사라지는데 별별 방법을 다 써도 막을 길이 없다는 거였다. 도난을 막으려고 공구에 이름을 써놓았더니, 아침에 잃어버린 공구를 오후에 중고시장에서 발견하게 되더라고 했다. 그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한 것도 알고 보면 도둑질을 감당 못해서라고 했다. 전쟁터에서 이쪽을 보고 있으면 총이 사라지고 저쪽을 보고 있으면 총알이 사라지는 통에 전쟁을 계속할 도리가 없었다는 거다. 나는 그의 해석에 동조하면서, 어느새 미군의 시선으로 베트남인들을 보고 있었다. 나는 베트남인들이 깡마른 체구에 까만 눈을 반짝이며 저희끼리 떠들어댈 때면, 나를 속이고 벗겨먹을 작당을 하는 거라고 의심했다.
바가지 쓴 금액을 환불받을 결심으로 하노이에 도착하자마자 통킹호텔에 찾아갔다. 늦은 시간이라 경비 혼자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갔다.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여직원이 혼자 있었다. 사정 얘길 했더니, 자기는 잠깐 도와주러 온 친구일 뿐 직원이 아니라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다. 경찰서에 갔다. 그러나 경찰은 텔레비전을 보느라 바빠 내 사정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다시 통킹호텔로 가서 사장이 언제 오는지 물었다. 직원이 아니라는 여직원이 저녁 6시 이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마침내 길고 긴 연휴가 끝나고 박물관과 유적들이 문을 열었다. 문묘에 갔다.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을 모신 사원이었다. 사원 앞에서는 효孝, 지智, 덕德, 수壽, 복福, 등과登科라고 쓴 종이를 팔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사원 곳곳에서 그 종이를 모아 쥔 손을 빠르게 흔들며 소원을 빌고 있었다. 대학자들을 모신 사원이라 학업성취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기도하는 방법이 각양각색이었다. 제단 앞에 어린 아들과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아들의 얼굴 앞에서 촛불을 위아래로 흔들며 기도하는가 하면, 위패를 모시는 나무장의 벽면에 손가락으로 소원을 적기도 했다. 성스런 자태로 기도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제 복을 빌고 있기 십상이겠으나, 베트남 사람들은 빠른 손놀림과 몸놀림 탓에 유독 세속적인 복을 비는 인상을 줬다. 정직하게 살아야지 백날 기도만 한다고 복을 받겠냐고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문묘를 나섰다.
종일 비가 왔다. 그런데 샌들 밑창이 물에 약한 코르크라 비를 못 견뎠다. 결국 밑창이 떨어져 신발 수선집엘 찾아갔다. 샌들을 보여주며 수선비를 물었더니 수선공이 간신히 붙어있던 밑창을 확 뜯어내면서 100,000동을 불렀다. 신발을 못 신게 만들어 다른 델 못 가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괘씸해서 그 집 슬리퍼를 뺏어 신고 다른 수선집엘 갔다. 결국 30,000동에 수선을 했는데 영 솜씨가 서툴다했더니 몇 걸음도 못가 밑창이 도로 건들거리기 시작했다.
신발을 질질 끌고 통킹호텔에 갔다. 직원이 아니라는 여직원이 퇴근 준비를 하는 동안 매니저라는 남자가 상냥한 낯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설 연휴라 일할 사람이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놨다. 일할 사람이 없는 줄 알았으면 투어상품을 팔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말 안 되는 상품을 바가지까지 씌워 팔았으니 바가지 쓴 45달러라도 환불해달라고 했다. 그는 가격이 다른 건 호텔과 배의 등급이 달라서라고 했다. 나와 같은 호텔에서 자고 같은 배를 타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은 사람들이 65달러를 냈다고 하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면서 만약 65달러를 냈다는 사람을 데려오면 당장이라도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일정한 거처 없이 빠르게 이동하는 관광객의 생리를 잘 알고 하는 얘기였다.
로비에 있던 투숙객 커플과 얘길 하게 됐다. 그들도 나와 똑같은 경우를 당했다고 했다. 그들은 65달러에 하롱베이투어를 파는 호텔을 봤다면서 인터넷에서 주소를 찾아서 알려주었다. 그 호텔에 찾아가서 가격이 적힌 브로슈어 같은 걸 받아오면 증거가 되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들은 자기들 방 번호를 알려주면서 환불을 받게 되면 꼭 좀 알려달라고 했다.
매니저에게 65달러에 똑같은 상품이 팔린다는 브로슈어를 가져오면 증명이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브로슈어를 받아온다고? 그걸 어떻게 믿어? 니가 가짜로 쓰려고 그러는 거지?” 내가 같이 가서 확인해보자고 했다. “여기가 내 여관인데 내가 왜 거길 가? 니가 가서 그 사람들 데려와. 데려와 봐. 거짓말이니까 못 데려오는 거지? 거짓말하는 게 아니면 왜 못 데려와? 내 여관으로 데려오란 말야!” 귀가 따가워서 나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히 좀 해!” 그는 자기도 믿지 않는 말을 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그렇게 악을 쓰다가도 뒤 돌아서면 바로 자기편과 낄낄거렸다. 처음엔 불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이 진지함이 결여된 싸움에 진지함 없이 임할 수 있게 됐다.
한참 후 사장이 들어왔다. 그는 짐짓 나를 못 본 체하며 피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억지로 불러 앉혔더니 대나무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뜸을 들이다가는 저녁을 먹어야한다면서 식당으로 가버렸고,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러 앉혔더니 또 담뱃불을 붙이면서 시간을 끌다가 전화통화를 한다면서 나가버렸다. 매니저는 계속 사장을 빼돌리면서 자기가 책임자라고 주장했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 사장을 상대해야만 승산이 있다는 걸 이해했다. 그런데 통화한다고 나간 사장이 아무리 기다려도 안 들어왔다. 사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집에 가는 길이라면서 다음 날 보자고 했다. 기다리겠다고 했더니 집에 가는 길이라던 사장이 안채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샤워를 한다면서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화장실이 마주보이는 식당에 앉아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드디어 협상이 시작됐다. 매니저가 20달러를 불렀다. 내가 버틸수록 금액이 올라갔고 매니저가 마지막 협상 금액이라면서 40달러를 불렀다. 그러자 사장이 화가 나서 베트남어로 꽥 고함을 질렀다. 사장이 소리쳤다. “30달러가 공정해.” 그러자 매니저가 따라 외쳤다. “그래 30달러가 공정해, 공정해, 공정해!”
사장은 말머리에 '마이 프렌드'라는 말을 붙이길 좋아했다. “나 니 친구 아니거든.” 하고 대꾸했지만, 세 시간을 들러붙어 씨름하는 동안 나는 그들에게 모종의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고, 30달러를 받아들었을 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환불소식을 알리러 투숙객 커플에게 올라가기가 꺼려졌다. 그냥 여관을 나왔다. 마음이란 얼마나 이상하고 어리석은지. 나는 사기꾼들과의 의리를 위해 나를 도와주었던 투숙객들을 배신한 것이다. 비가 왔다. 통킹 호텔에 우산을 두고 왔지만 찾으러 가지 않았다.
그날 밤 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플랫폼에서 표를 확인하는데 한 남자가 다짜고짜 내 트렁크를 낚아채 기차에 올랐다. 그는 채 만류할 새도 없이 내 자리로 달려가 짐을 놓고는 1달러를 요구했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는 내 어깨를 밀치며 열차에서 내려 또 다른 승객을 향해 달려갔다. 너무 피곤해서 열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자리에 누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차창 밖으로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훼에도 비가 내렸다. 여관에 짐을 풀고 신발 수선점을 찾아갔다. 파란 천막 밑에서 노인이 구두를 닦고 있었다. 수선비는 20,000동이었다. 노인이 차분한 손길로 신발을 수선하는 동안 나는 옆에 앉아 천막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신고 있던 크록스 샌들의 미끄럼방지창도 떨어져 너덜대서, 그것도 새로 붙이기로 했다. 노인은 낡은 창을 떼어내고 반반한 검정 창을 붙이더니 조각칼로 격자무늬 홈을 팠다. 손으로 판 무늬가 예뻤다.
훼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의 수도였다. 구도심에 있는 왕궁에 가보기로 했다. 계속 비가 와서 가게에서 접이식 우산을 샀다. 우산을 펴는데 우산살을 잡고 있던 실이 뚝 끊어졌다. 다른 우산으로 바꿔보았다. 이번엔 우산살이 휙 휘어졌다. 그곳에선 다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니까 우비를 입지 우산을 안 썼다. 아이들만 어린이 우산을 쓰고 걸어 다녔는데, 그게 제법 튼실해보이던 기억이 났다. 시장까지 가서 어린이 우산을 샀다. 그러나 바람 따라 나부끼는 비를 피하는데 우산은 별 도움이 안 됐다.
훼성에 도착해보니 문이 닫혀있었다. 난감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점심시간이라 문을 닫은 거라면서 한 시 반에 다시 문을 열거라고 알려줬다. 가이드북엔 점심시간에 문을 닫는다는 얘기가 없어서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일부러 알려주었는데 못 미더워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그냥 돌아섰다. 2시간이나 뭘 할지 고민하는데, 좀 전에 그 남자가 시클로를 몰고 따라와 구도심투어를 하라며 호객을 했다. 공연히 친절을 베푼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를 지나쳐 구도심을 돌아다녔다. 다니다가 하롱베이에서 룸메이트가 될 뻔했던 독일여자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우산도 우비도 없이 비를 맞고 서서는 아직도 따뜻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노라고 했다. 사정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루앙프라방을 떠난 뒤로는 늘 추웠고 이제는 비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나보다 샌들이 더 힘들어 했다. 본드를 붙인 밑창에선 걸을 때마다 뽀글뽀글 거품이 일었다.
1시 반에 훼성의 정식 입구에 도착해서야 처음에 갔던 곳은 입구가 아니어서 문을 닫았을 뿐, 훼성은 점심시간에 문을 닫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훼성은 건물들이 첩첩이 둘러싸인 구중궁궐이었다. 건물들 사이로 하얀 가랑비가 안개처럼 흘러 다녔다. 빗속을 걸으며 그동안 만난 거짓말쟁이들에 대한 분노를 곱씹었다. 그들은 무례하고 뻔뻔스럽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시끄럽고 붙임성 있으며 작은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온갖 복수를 상상했으나 실현 가능성은 제로였고, 그럴수록 분노는 점점 더 커졌다.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비치된 휴지를 챙겼다. 그런데 휴지를 가방에 넣다가 관계자로 보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화장실을 나와 빠르게 걸으면서 생각했다. '물어보면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휴지라고 할 테다.' 나 역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게다가 나는 도둑질까지 하지 않았는가. 순간 터질듯이 부풀어 오르던 분노가 맥없이 푹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