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할 한 끼
수술 후 며칠이 지나자 침대 커튼을 닫을 새도 없이 문병인이 이어졌다. 남편이 아침에 그날 올 사람을 알려주면 휴대폰 메모장에 시간대별로 적어 두었다. 일가친척은 물론 친구, 선후배, 회사 동료들까지 익숙한 이름도 있었고 낯선 사람도 많았다. 내 환자를 위한 보호자의 중차대한 임무가 또 하나 추가된 셈이다.
남편이 입원해 있던 병동은 입구에서 환자나 보호자 바코드를 찍어야 문이 열린다. 시간 맞춰 자동문 앞을 서성이다 기다리던 분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다가가 문을 열어드렸다. 신기하게도 문병 온 남편 또래 남자들의 표정은 어쩐지 닮아있었다. 얼마 전까지 함께 술 담배를 줄곧 마시고 피워대며 일에 찌들어 살던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졸지에 암 환자가 된 현실에 ‘남의 일이 아니구나’ 같은 걱정을 와락 껴안은 겁먹은 아이처럼 보였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와 같은 최소한의 말을 건네고 서둘러 남편에게로 인도했다.
다행인 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동을 들어설 때는 불안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지만, 남편을 마주하는 순간 환하게 웃어주었다는 것이다. 격동의 며칠을 지나온 남편을 위로하며 이제 다 잘될 거라고 응원했고, 이내 평소 같은 가벼운 농담으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다. 애정이 담긴 떠들썩한 목소리가 머물다 간 병실에서 남편 역시 조금씩 밝아졌다.
그제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고, 그날도 그랬다. 오전에만 이미 두 팀이 다녀간 뒤였다. 소변 통을 비우러 가며 문득 ‘내 남편 인생 잘 살고 있네’라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 간호사가 물었다.
“남편분 연예인이세요?”
“네?”
“문병하러 오는 분이 정말 많아서요”
“그러게요”
연예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남편을 찾는 문병인이 많았지만, 내 마음은 헛헛했다. 유치한 투정이지만, 나 역시 위로가 필요했다. 느닷없이 일상이 깨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역시나 병원 밖 세상 얘기에 고픈 나날이었다. 한 번 생겨난 못난 마음은 멈출 줄 모르고 커져 갔는데, 때마침 이런 내 마음에 제동을 걸어줄 친구 S가 왔다. 일하랴 애 키우랴, 사는 게 바빠 일 년에 한두 번 밥 먹는 게 전부지만 경조사만큼은 빠뜨리지 않는 친구다. 그렇다 해도 나도 아닌 내 남편의 병문안을 와준 것은 뜻밖이었다.
“오빠 보러 온 것도 맞는데 내 친구 밥 사주러 온 거야”
남편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너무 멋져서 그대로 굳어버리는 줄 알았다. 이런 멋짐은 배워서 장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를 일찍 낳고 키워서 그런지 분명 나보다 어른임이 틀림없다.
이제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병원에 들어오고 제대로 끼니를 챙겨본 적이 없었다. 처음 며칠은 경황이 없어서 목구멍에 밥이 들어갈 리 없었고, 그 이후에는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더 많았다. 그래서 사실 서럽기도 했다. 남편이 단식일 때는 함께 식사를 끓었고 검사받느라, 문병인에게 인사하느라 구내식당 때를 놓치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입맛도 타이밍도 잃었다. 이런 와중에 내 친구가 내 밥을 챙기러 와준 것이다. 날 보러 와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당장 급한 검사 일정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소금쟁이 보다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 밖으로 나왔다. 바깥공기는 무척 달았다.
불행을 뒤집어쓴 날 위한 위로는 어쩌면,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한 아니 스스로도 챙기지 못한 밥 한 끼였는지 모르겠다. 함께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는 누군가가 앞에 있는 그런 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고맙다’는 한마디로는 충분하지 않은 그날의 한 끼는 내가 받은 최고의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