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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파란 Jul 10. 2023

봄날의 고백

어둠이 켜지듯 암이 찾아왔다


기쁨은 대개 간절했던 기다림의 끝이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슬픔은 주로 빛나던 전구의 퓨즈가 끊어져 어둠이 켜지듯 느닷없다.


“나 간암이래”


우리의 오랜 슬픔이 될 '그것'도 불현듯 찾아왔다. 새로운 시작의 상징과도 같은 3월 어느 날, 인생의 마침표 같은 말이 남편 입에서 새어 나왔다.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조차 죄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힘없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건 크건, 힘이 들어가 있든 그렇지 않든 ‘암’이라는 단어가 갖는 기운은 무서웠고 거대하게 부풀어 순식간에 우리를 압도했다.  

     

그날은 내가 일에서 해방된 지 열흘쯤 된 날이었다. 결혼 전에는 물론이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쉴 틈이 없었다. 큰아이를 낳고는 8개월 만에, 작은 아이는 백일쯤 지난 뒤 복직했다. 공백이 길어지면 내가 잊힐까 봐, 일을 놓으면 감을 잃을까 봐. 계속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프리랜서 방송작가라 주말도 밤낮도 없는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이었다. 줄곧 버스도 지하철도 끊긴 새벽에야 택시를 잡아 타고 퇴근하는 삶이었지만 유치원에 다니는 큰아이와 함께 잠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고, 손이 많이 가는 어린 둘째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양자나 다름없이 친정에 살다시피 했다. 시집 안 간 이모가 부지런히 보내주는 동영상으로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육아의 8할이었다. 어느 날 문득, 꾸역꾸역 견뎌내는 삶이 서러웠다. 큰아이 초등학교 가기 전 일 년쯤은 쉬어야겠다고 다짐이자 선언을 했고 그렇게 백수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그 밤,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큰아이와 작은 아이를 양옆에 끼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누군가 내 발을 잡고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침대 발치에 남편이 서 있었다. 


“일어나 봐, 할 말 있어” 


그 할 말이라는 게 ‘암’ 얘기였다. 살면서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것도 자다 깨서. 꿈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가 날 바라보는 남편의 슬픈 눈동자를 보고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뱉을 수 있는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디서?” “누가?” “얼마나 됐대?” 정도였다. 나오는 대로 질문을 하긴 했지만 대답하는 남편을 바라볼 용기는 없었다. 애꿎은 패브릭 소파 보풀만 잡아 뜯고 있었다. 앉은자리 주변으로 빼곡한 보풀처럼 다 엉망진창이다. 이제 쉬면서 돌볼 생각이었다. 아이들도 나도 그리고 그도. 게으른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부지런한 암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건강검진 간 초음파 검사를 하면서 처음 들었다고 했다. 조직검사까지 갈 필요도 없이 초음파상으로 본 배 속 무엇이 누가 봐도 암이었나 보다. 당장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에 남편은 그 와중에 ‘살려면 서울대학교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찾아간 그 병원에서 간세포암 진단을 받았다. 나에게 털어놓았을 때는 본인 몸속에 암이 자라고 있음을 안 지 2주일 정도 지난 뒤였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 거다. 검진받은 날은 2월 28일이었다. 그 해 검진기한 마지막 날이다. 왜 작년이나 재작년엔 멀쩡했는데 올해 갑자기 이렇게 됐냐는 내 물음에 무려 지난 7년 동안 한 번도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음을 실토했다. 순식간에 안쓰러움이 원망으로 바뀌었다. 지난 수년간 내게는 검진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인가. 아니 난 남편이 검진을 했다고 믿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1~2년 먼저 알았더라면 지금이랑 상황이 달랐을까. 지금보다 슬프고 두려운 마음이 덜했을까. 최근 몇 년간 부쩍 살이 많이 찌고 피부색이 어둡기는 했다. 워낙 술 담배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 그런 줄 알았다. 매번 검사 좀 받자, 술 담배 줄여라 해도 다 큰 사람을 내 말 몇 마디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멱살 잡고 병원에 끌고 갔어야 했나. 매년 검진 결과서를 확인했어야 했나. 별의별 자책과 후회가 밀려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내뱉은 온기로 먼지 한 톨 내려앉을 새도 없이 방방 떠 있던 우리 집이었는데, 무겁고 어두운 한숨으로 가득 찬 공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해 봄, 남편은 마흔한 살, 나는 서른아홉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일곱 살, 네 살. 두 아이가 있었다. 우리 가족의 일상은 호떡 뒤집히듯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뒤집은 쪽이 시커멓게 타버린 것처럼 절망적이었다. 


나는 뵌 적이 없는 남편의 어머님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병을 알게 됐을 땐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때였고 수년을 앓다 군복 입은 아들을 두고 눈을 감으셨다. 이제는 군복을 벗고 민방위도 끝나고 그 시절 엄마 나이 언저리가 된 아들이다.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그 고백을 이제 내가 해야 할 차례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엄마다. 내가 쉬지 않고 일하는 동안 엄마도 쉴 새 없이 나의 두 아들을 키웠다. 이제야 엄마를 잠깐 놓아 드릴 수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근심거리를 안겨드려야 하는 꼴이 됐다. 우리 가족에게 닥친 현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차 안에서 전화를 걸었다. 동생에게. 


“형부 암 이래” 


다짜고짜 말했더니 동생 역시 다짜고짜 울었다. 


“어떡해” 


그렇게 우린 한참 울었다. 암은 전염병이 아니지만, 그에 따른 슬픔은 전염이 된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 틀렸다. 암을 둘러싼 슬픔은 나누면 곱절이 된다. 엄마에게는 어떻게 말할 것인지 동생과 생각을 나눈 후 엄마에겐 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싸고 양도 많아 엄마가 자주 가는 열무 냉면 집이다. 이십여 분 걸어가며 말할 생각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얘기가 한참을 오가고 냉면집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급해 서둘러 뱉어내고 말았다. 


“엄마, 송 서방 간암이래” 

“고치면 되지” 


엄만 감기에 걸렸거나 발이 부러진 정도로 알아들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암이라고” 

“그러니까 병원 다니면 되지”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 더 아팠다. 슬픔과 불안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게 훤히 보여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암 환자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마음속에 슬픔과 두려움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싹이 나고 뿌리가 뻗어나가 무럭무럭 자라 불안이 일상이 될 것이다. 공포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 것이다. 


엄마와 나, 우리의 불안이 버무려진 그날 냉면은 예전 그 맛이 아니었다. 유독 많이 남긴 엄마의 그릇을 보니 엄마도 그랬나 보다.     


그렇게 봄날의 고백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그렇게 실재의 암과 더불어 무형의 암이 내 세상을 잠식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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