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자리를 지켜낸다는 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8년 전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
결코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
비가 갑자기 억수처럼 쏟아지던 어느 저녁
퇴근 후 귀가하신 아버지는
비를 그냥 뒤집어썼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흠뻑 젖은 채 문 앞에 서 계셨다.
"전화를 하시지 그러셨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불쑥 말이 튀어나온 나에게
아버지께서 이내
"두루마리 휴지가 집에 없는 것 같고 해서
필요한 장을 봐 온다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서
나서는데 비가 갑자기 온다아이가.
양 손에 짐이 가득한데 우짜겠노?
그냥 비 맞고라도 짐은 들고 와야지"
순간,
'아버지'라는 이름 안의 삶의 무게가
내 마음을 서글프게 뚫고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뭐라고,
비를 쫄딱 맞고서라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별 거 아닌 것들의 부재로
행여 가족들의 불편함이 거칠까 싶어
그 안쓰럽고 짠한 아비의 심정으로
비가 퍼붓던 그 저녁
아버지는 한 손에는 두루마리 휴지 뭉치와
또 다른 한 손에는
과일 등의 식료품이 담긴 종량제 봉투를 들고
우산을 쓸 수 없이 그 큰 비 속을
터벅터벅 걸어오신 거였다.
내게 아버지의 부성애가
가장 구체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모습이다.
다음 장면은 그 이후 몇 년이 흘러
1인실 병실에 누워 계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항암제 투여 후유증으로
극심한 빈혈이 온 아버지에게 수혈 처방이 내려졌다.
수혈 중 저체온증이 오신 아버지가 춥다 하셔서
따뜻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이불과 덮을 것은 총동원하여
아버지의 체온이 조금이라도 오를까 덮어드리고
그 덮인 이불을 부여잡고 있던 내게
한기로 인해 덜덜 떨고 계시던 아버지의 외로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해드릴 것 없던 자식과의
보이지 않는 그 거리가
얼마나 사무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삶은
일평생 가족을 위해 골수까지 내 줄 정도의 수고함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그 추운 병실의 덜덜 떨고 계셨던 아버지처럼
결국 고통 또한 홀로 지고 계셔야 하는 삶이셨다.
남편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은 또 달리 애잔하다
매달 말일 직원들 월급이다 뭐다 돈 맞출 일에
마음이 조여 환장할 노릇인데
눈치 없는 아내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딸아이와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같이 밥 먹는 시간을 일주일에 한 번은 가져야 한다는
우아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건넨다.
(아이고 두야! 두야!)
그 마음속 기가 차다는 소리가 비집고 나와
내 귀에도 들릴 지경이다.
친정 오빠는 또 어떤가?
서울에 있는 새언니와 딸을 보러
2주 3주마다 KTX에 몸을 싣는다.
코로나 이후 학생들을 위해
동영상으로 수업내용을 촬영하는 일이라는
수고가 더해진 근로현장에서 지친 몸을
쉴 겨를도 없이 그 피곤한 몸을 쳐서
직장이 있는 부산에서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가는 KTX에 오른다.
그 차 안에서 피곤함에 입을 벌리고 졸고 있을
오빠의 얼굴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가족의 울타리라는 소중함을 지켜내기 위해
내가 아는 내 주위의 남성들의 인생은
고달픔 그 자체다.
물론, 그 자리를 기뻐하며 지켜내는 것 같지는 않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책임감 앞에
너무 자주 불평의 말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이해가 되는 것은 왜일까?
아버지라는 자리의 무게를 감당한다는 것은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모성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기대치는 항상 높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해서
얼마나 강건하여 그 삶을 버티고 있을까?
아버지라는 이름에 자신을 맞춰보려고
닿지도 않는 높이의 물건을 꺼내기 위해
연신 펄쩍펄쩍 뛰어야 하는 아이처럼
이 남성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숨이 찰까?
껍데기같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내가 자식들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산다던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비신앙인으로 사셨지만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는 성경 말씀이 언제나 떠오른다
어버이날,
천국 가신지 8년 세월
한시도 잊은 적 없는
비 오던 그 날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마구 그리워진다
천국 가면 뵐 수 있으리라는
그 소망으로 삽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