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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된 선체에서 발견된 두 대의 휴대전화 데이터가 복구됐습니다. 선생님과 학생의 것으로 보이는 두 대의 기기에서 3년간 바닷속에 잠겨 있던 통화기록, 메시지, 사진 등이 되살아난 겁니다. 꼭 살아만 있어 달라는 간절한 메시지를 비롯해 사고 소식을 들은 가족과 지인이 다급하게 보낸 것도 많았는데, 안타깝게도 메시지들은 모두 읽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2017년 5월이 끝나갈 즈음, 중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뉴스를 들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내 신경을 곤두세우는 소식이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반지하 월세 집을 전전하던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인천 부평구의 한 빌라로 이사를 했다. 할머니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식당일을 하셨지만, 하율이는 훌쩍 자라 벌써 초등학교 3학년이 됐고, 나는 어느덧 중학교 졸업반이었다.
이 무렵 나는 지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곁에 없는 모든 것들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제대로 특정할 수 없었다. 단 하나, 어릴 적 믿고 따르며 좋아했던 다연 누나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쓸쓸함과 고독의 무게를 홀로 짊어진 양 매일 어두운 표정으로 학교 옥상에 올라가 책을 읽었다. 대부분이 시나 소설, 수필 등의 문학 서적이었다. 이 무렵 나는 장래희망에서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여전히 그림을 그렸지만, 그것보다도 시를 쓰거나 짧은 이야기를 짓는 시간이 더 많았다. 중학교 시절 다연 누나가 작가의 꿈을 꾸게 된 것처럼, 나 역시 언젠가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씩 품게 됐다.
우리의 이사가 의도된 것은 아니더라도 다연 누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된 건 행운이었다. 다연 누나는 인천가족공원 만월당에 누나의 엄마가 모셔진 곳 옆에 나란히 머물게 됐다. 지난달 다연 누나의 삼 주기 때 하율이와 함께 가족공원을 찾아, 예전에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봉안함 유리에 작은 꽃다발을 붙이고 왔다. 누나가 이사를 가고 결국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뒤늦게나마 우리가 누나의 곁을 따라 가깝게 쫓아온 셈이다.
집에 돌아온 나는 학교 숙제를 하고 있는 하율이에게 버스에서 들은 뉴스 소식을 전했다.
“삼 년 전 그때, 배에서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아서 몇 개 복구했대.”
“정말? 다연 언니 것도 있으려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지난해 구입한 핸드폰을 켜서 유튜브 뉴스를 검색했다. 이제 집에서도 무선인터넷이 되니, 우리 집 형편도 나름대로 나아진 셈이다.
‘휴대전화 복구’를 검색어로 찾아보다가, 몇 분 만에 어느 탐사보도 뉴스채널의 한 영상을 클릭하게 됐다. 그곳에서는 사고 당시 상황이 담긴 복원된 휴대전화 동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어려움은 있겠지만 만약 모든 휴대전화를 복구시킬 수 있다면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큰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고 뉴스는 보도했다.
뉴스를 보다가 내가 더욱 주목한 것은 앵커의 다음 말과 이어진 화면이었다. “휴대전화들의 복구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라는 멘트와 더불어 선체조사위원회의 회의장으로 화면이 전환됐다. 바로 그때 인양 과정에서 찾아낸 핸드폰 속 사진 두 점이 화면 위에 떠올랐는데, 어느 젊은 여자 선생님의 사진과 익숙한 여학생의 사진이었다. 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셀카 사진으로 보이는, 삼 년 전 익숙한 얼굴 그대로의 다연 누나였다. 사진 아래로는 ‘2학년 8반 정다연’이라는 자막이 붙어 있었다.
인양된 배에서 미수습자 수색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목포신항으로 화면이 이어졌다. ‘미수습자 가족 만남의 장소’에는 미수습자 가족을 비롯하여 관련 유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복구된 핸드폰의 데이터를 USB에 담아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선체조사위원회 전문위원 한 명이 직접 USB를 전달했지만, 유가족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인터뷰를 했다.
“우리 딸은 진즉에 찾았고, 여기 아직 자녀들을 찾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 죄송하긴 한데요.”
중년 남성의 인터뷰 장면에서 그의 이름이 자막으로 표시됐다. ‘故정다연 학생 아버지, 정주성’ 아, 다연 누나의 이름을 또 이렇게 보다니. 누나의 이름 앞에 놓인 한자 ‘故’가 나는 아직까지도 너무 낯설었다. 저분이 다연 누나 아빠구나. 저렇게 생기신 분이구나. 몇 년 사이 마음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그는 무척 수척해 보였다.
“여기 미수습자 가족 분들께 염치없지만, 전 아직까지 딸을 마주하는 게 너무나…… 아파요.”
다연 누나의 아빠는 그곳에 모인 가족 중에서는 상황이 그나마 가장 나은 편이라고 했다. 진즉에 유해를 수습했고, 소지품 중 핸드폰까지 복구가 되었으니 이미 찾을 건 모두 찾은 셈이라고 했다. 그래도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그곳을 자주 찾아온다고 했다.
그런 그였지만 막상 어렵게 복구된 딸, 그러니까 다연 누나의 사진이나 동영상 자료들을 열어보는 데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연 아빠, 한 번 열어 봐주세요. 다연이 사진 속에 우리 애들이 같이 찍혀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 그… 그렇겠네요.”
선체조사위원회 전문위원이 노트북에 USB를 꽂고 복구된 사진 파일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다연 누나 아빠를 비롯해 다른 유가족, 미수습자 가족 모두가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다연 누나의 다양한 사진이 나올 때마다 누나의 아빠는 눈물을 흘렸고,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내 눈에서도 잊고 있던 눈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어? 저 학생 상민이 맞죠?”
“맞네.”
“상민이다, 흑흑.”
‘박상민 학생 어머니, 심주연’이라는 분이 인천항 대합실에서 다연 누나와 함께 있는 한 여고생의 사진을 보고서 ‘상민이가 맞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박상민 학생은 여전히 수습되지 못한 네 명의 학생 중 한 명이라고 자막은 소개했다. 눈물을 흘리던 내 눈동자가 커졌다. 눈물방울이 무릎 위에 뚝 떨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연 누나 아빠가 덧붙였다.
“근데… 우리 다연이랑 상민이랑 친한 사이였구나. 다연이는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을 땐데… 둘이서 저렇게 다정하게 찍은 걸 보니.”
다연 누나 아빠와 박상민 학생 어머니라는 분이 놀람과 동시에 서로를 토닥이면서 말했다.
“우리는 서로 모르던 사이였어요. 여기 와서 친해지고 서로 힘이 돼줬는데. 우리 딸들은 이미 전부터 친한 사이였네요. 그런 것도 전혀 모르고 지내왔어요.”
박상민. 잠시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삼 년 전, 한 달 만에 사귄 절친이라며 다연 누나가 이메일로 소개해준 친구. 나와 똑같이 웹툰 작가를 꿈꾼다며 다연 누나와 자주 진로를 고민했다던 친구. 그런데… 형이 아니었구나. 바로 저 누나였구나. 이름만 듣고서 나는 멋대로 저 누나를 미워했었다. 만약 형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다연 누나의 소중한 친구를 미워하면 안 됐었는데…….
유가족들은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모습들을 어떻게든 간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연 누나의 아빠는 말했다.
“서로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되니까 그래도 좀 위로가 되고, 그 친구들이랑 지금 같이 잘 지내고 있나, 하고 생각하는 게 또 우리 가족들이 버티는 힘이 돼요. 그니까 꼭 다 찾아주세요. 못 찾은 우리 자식들이랑… 또 잃어버린 핸드폰도 모두 복구해 줬으면 좋겠어요.”
*소설에 나오는 탐사보도 뉴스채널의 영상은 「뉴스타파-세월호 휴대전화 복구의 또 다른 의미」(2017.6.13.)에서 故김민지 학생의 아버지 김창호 님, 故이은화 학생의 어머니 이금희 님, 故허다윤 학생의 어머니 박은미 님의 인터뷰를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