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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Oct 18. 2024

함께 쓴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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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연 누나의 오 주기가 가까워진 지난주 토요일, 기억전시소에서 열린 ‘꿈을 기억하는 꿈’이란 전시에 다녀왔다. 깊은 바다의 푸른색을 배경으로 한 유리관 속에는 안타깝게 멈춰버린 꿈의 기억들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었다. 오 년 동안 연주되지 못한 전자기타,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재생되는 태블릿PC, 꽤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축구공, 다 풀지 못한 문제집. 그리고 다연 누나의 낡은 하늘빛 노트가 그 가운데 놓여 있었다. 전시된 물건의 소개글에는 채 꽃을 피우지 못한 학생들의 장래희망에 관한 설명이 빼곡했다.

 나는 다연 누나의 익숙한 노트 앞에 멈춰 서서, 내가 천천히 한 자 한 자 옮겨 썼던 다정한 글씨체를 바라봤다. 다연 누나가 도움을 바랐던 소설의 결말도 이제 곧 최종 완성을 앞두고 있다. 결말은 아마도 소설을 옮겨 쓰며 떠오른 어떤 기억이 되리라. 우리의 기억을 쓰는 것이므로 그건 내가 혼자 쓰는 것도 아니요, 다연 누나가 홀로 쓴 것도 아닌, 우리가 함께 쓴 기억이다. 오 주기에 맞춰 함께 쓴 그 마지막을 다연 누나에게 선물할 것이다.

 결말을 완성하고 나면 다연 누나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나의 시점으로 써볼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건 나의 또 다른 꿈이 되리라. 언젠가 다연 누나가 들려줬던 영화의 대사가 생각난다. 서부극 소설 작가 몬티의 말. 다연 누나가 인상 깊게 들었던, 꿈을 갖게 한 말. 이제는 나의 것이 된 누나의 말.

 “상상력이지. 너만의 것을 봐야 돼. 안 보이는 걸 찾는 걸 멈추면 안 된단다.”

 다연 누나도 언젠가 그런 얘길 메일에 쓴 적이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새롭게 쓰다 보면, 우리 이야기들이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고. 같은 걸 두고서도 또 새롭게 기억하려는, 소중한 이들의 멈추지 않는… 아름다운 대화 같다고.     


 2019년 4월 16일. 다연 누나가 그랬듯 나도 똑같이 부평삼거리역 앞 꽃집에서 작은 꽃다발 하나를 샀다. 꽃다발을 왼손에 쥐고, 완성시킨 소설 결말이 담긴 편지를 오른손에 쥐었다. 느리고 천천히, 오래 읽는 마음으로 인천가족공원 만월당 안으로 들어갔다.

 ‘만월당(滿月堂)’이라고 새겨진 표석 앞 봉안 건물, 그 한가운데 텅 빈 공간으로 푸른 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마치 커다란 보름달 안에서 자라나는 싱싱한 계수나무처럼. 한때 비워졌던 내 가슴속으로도 저렇듯 자라나는 기억이 있다. 그건 지나간 기억이 아니라, 앞으로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미래의 기억이 되리라.

 가져온 편지를 하늘나라 우체통에 넣었다. 우리가 쓴 소설이, 우리의 이야기가 먼 하늘에 퍼지길 기대하면서. 닿을 수 없는 별과 구름이, 그걸 올려다보는 많은 사람들이, 다연 누나를, 나를, 우리를 잊지 않도록 오래오래 바라면서.

 새로 산 꽃다발은 모녀가 나란히 자리한 다연 누나의 봉안함 유리에 붙였다. 이미 작은 꽃뭉치 하나가 붙어 있다. 누나의 아빠가 벌써 다녀갔는지도 모르겠다. 봉안함 옆 자그마한 액자 속 다연 누나에게 나는 소리 없이 말했다.

 ‘누나가 부탁한 거 편지로 잘 써서 하늘나라 우체통에 넣었어. 소설이 완성됐으니, 이제 누나는 작가의 꿈을 완전히 이룬 건가? 꿈을 하늘에서 이룬 셈이네.’

 나는 잠시 다연 누나 소설의 제목을 떠올렸다.

 ‘누나가 꿈에서 소설 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한참 생각해 봤거든.’

 그러면서 오래전 붉은 저녁의 한 대화 장면을 회상했다.

 ‘도봉구 살 때, 그 버드나무 평상에서 취미 얘기한 적 있잖아. 난 그때 들은 누나의 말이 어렵지만 또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 그 말이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르더라. 아마 누나의 글을 필사할 때였던 것 같애. 결국은 누나가 내게 힌트를 준 거야.’

 “…….”

 ‘그때만큼 아름다운 풍경과 결말이 없을 것 같더라구.’

 “…….”

 ‘누나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뭐, 누나가 한 말을 쓴 거니까, 누나가 직접 쓴 거나 다름없어.’

 나는 마지막으로 다연 누나 사진과 다연 누나 엄마의 사진을 번갈아봤다.

 ‘이렇게 보니 누나는 누나 엄마를 쏙 빼닮았네. 모녀 사이니까 당연하다고? 근데 왜 난 그동안 누나가 우리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누나가 우리 엄마처럼 너무 예쁘고 다정해서 그랬나.’

 올해로 나는 다연 누나와 똑같은 나이, 열여덟 살이 됐다. 나는 이제 울지 않았다. 울보의 기억은 지난 열일곱에서 그만 멈추려 한다. 대신 나는 환하게 웃었다. 봉안함 옆 액자에 담긴 다연 누나의 환한 미소를 천천히 따라 지으면서. 웃음을 필사하면서.

 ‘잘 지내, 누나. 또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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