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와 퇴근 후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친구와 통화했다.
"거기 워낙 맛집이라 자리 없으면 어떡하지?"
"그럼 미리 예약을 할까?"
이후 그가 예약하는 것으로 통화를 끝내고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그의 성격상 예약을 했으면 했다고 메신저를 할 텐데 아무런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메신저 앱을 켜서 예약했는지 물어볼까 말까 소심한 고민을 하다가 '당연히 했겠지. 괜히 못 믿고 물어보는 것 같으니 그냥 물어보지 말자.'하고 앱을 닫아 버렸다. 그렇게 조금은 찜찜한 채로 약속 장소에 가까워졌다. 목적지 역에 도착하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 저 멀리 나의 착한 친구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만나자마자 친구에게 물었다.
"예약했어?"
"어? 네가 예약한다고 했잖아."
이후 그는 아까의 통화 내용을 디테일하게 읊어 줬다. 내가 하기로 한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갑자기 오만가지의 감정이 휩쓸려왔다. 그때 고민하지 않고 물어볼 걸 하는 안타까움과 나에 대한 실망감, 나의 실수, 자신감 부족으로 주저했던 모든 순간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그 실망감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옳은 말만 하고 있는 그를 향한 미움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꾹꾹 눌러보려고 했지만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나도 그도 너무 당황했다. 하지만 참으려고 할수록 눈이 아닌 코, 횡격막 등 곳곳으로 전이되었다.
그 후로 눈물이 고이는 일이 많아졌다. 어이없을 만큼 사소한 것으로. 아마도 회사에서 분출하지 못한 감정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벅차지고, 나의 사적인 영역에 침범하여 자그마한 자극에도 분출이 되는 것 같았다. 원래의 나는 문제를 인식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찾아보고 적용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찾아보기가 싫었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하여 회사에서도 발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같은 해 중요하고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기존에 개발했던 작업물을 고도화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다른 조직과도 협업을 했다. 이 기회에 '나에게 다시 변화가 찾아올까?'하고 다시 예전의 열정이 살아나길 바랐다. 그런데 여태껏 맡아왔던 업무와 달리 더 넓은 범위의 업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버거웠던 것인지, 회사에서도 드디어 발현되고 말았다.
나는 이 병을 '아 맞다' 병으로 이름 붙였다.
이 병은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 미루다가 혼이 나고 나서야 몰랐던 척 '아 맞다' 하고 그제야 시작하는 병이다.
이 병의 증상은 출근할 때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많아 마음이 무겁고, 근무 중에는 무거운 마음의 짐들을 하나씩 없애고(해결하는 건 아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만들어 결국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퇴근한다. 일종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인 것이다. 이 사이클을 반복하다가 팀장님께 혼나며 '아 맞다'를 시전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쾌감은 엄청났다. 만약 진짜 잊고 있었다면 자괴감이 들었을 테지만 알고도 하지 않은 거라 나에게는 당당했기에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몇 달째 매일 반복되는 '아 맞다'의 사이클 속에서, 스스로를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는 동기부여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아 언젠가 괴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커녕 결국은 우려했던 현실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약 일 년간 잘 숨겨왔던 것이 들킬 날이 머지않아 보였고,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한 나의 세계를 내 손으로 무너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