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다

by 강아

걔를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서, 그를 잊기 위해 떠난 친구와의 부산 여행 마지막날 그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에게 ‘우리는 그만하는 게 좋을 거 같다'라고 말했다. 친구라는 명목으로 걔가 나에게 (잊힐 때쯤) 연락을 하는 것들은, 내겐 희망고문이었다. 나는 그럴수록 기대하게 됐다. 그런 기대하는 마음이 커져서 나중엔 원망이 되었다. 그러다간 그를 정말 미워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러기 전에 그의 그녀를 속이는 것도 그만하고, 그에 대한 내 마음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그는 '안된다'라고 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가 내게 갖는 감정은 사랑이 아닌 거 같았다. 그는 인정이 많고 온순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주변인을 살뜰하게 챙기는 스타일이고, 사람을 잃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할 때의 난 정말이지 비장했고 걜 다시 안 볼 자신도 있었다. 걜 만날 때마다 좋은데 너무 힘들었다. 그런 힘든걸 그만하고 싶었다. 근데 걘 계속 안된다고 하고 나는 어쩔 수 없단 식으로 전화를 끊었으며 다시 걔한테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걔가 연락이 와도 거절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거의 일 년 만에 온 연락은, 그런 다짐마저도 흐릿하게 만들었다. 용리단길이 핫하다는 명분으로 용산에서 홍콩 음식을 먹는데, 그림을 그릴 수가 있어서 시답잖은 그림을 그리면서 놀았다. 그의 소박함과, 같이 아무렇지 않은 일을 해도 '어떤 대단한 것을 누리는 것'처럼 되는 행복을 놓치기가 싫었다. 걔랑은 늘 그랬다. 별 특별하지도 않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하는 그냥 대화랑 그런 것들인데, 이상하게도 안정감을 주었다. 걔랑 그런 걸 하는 동안에는 온전히 우리가 세상의 중심에 있는 느낌이었고 걔랑 헤어지면 다시 세상 주변으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걔랑 있는 시간을 갈망하게 됐다. 내려갈 기차표도 이미 예매했지만, 헤어지기가 싫어 용산역의 쉑쉑에서 밀크셰이크에 감자튀김을 찍어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몰라 기차를 놓칠 뻔했다. 그냥 진짜 옆에 앉아서 먹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도 날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봐주고 그런 건 헤어지고 나면 기적처럼 느껴져서 신기루 같았다. 기차를 놓칠까 봐 허둥대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찾게 될 기차 타는 곳을 헤매다 또다시 난 기차에 타고 그는 나를 차창으로 바라봤다.


그때와 같은 데자뷔였다. 그때 1호선 지하철에서 나는 그에게 '우리는 만나기로 한 사이야'라고 적확하게 말해야 했다. 지금 떠나는 기차에서도 나는 기차에서 내려 '네가 좋아'라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도 기차에 올라타지 않았고 나도 기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가 날 계속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나는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척을 했다. 그가 날 바라보고 있는 걸 인식하는 게 좋았다. 그게 걱정이든, 서울까지 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