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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 Mar 17. 2024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무엇

재수생활은 지옥 같았다. 수능을 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결국 학원에 가야 했다. 아침에 1호선을 타고 가는데 대학교에 가는 친구들을 마주하는 것도 끔찍했다. 겉으론 티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열등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열등감보단 '내 처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여학교만 다니다 합반을 하게 된 이후로는 신선함도 함께했지만,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이번에는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반 아이들 중에는 영수랑, 준, 엽이가 친했다. 영수는 교대를 다니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사진으로 본 그 애는 참해 보였다. 하지만 재수학원에 다니는 그와는 가끔씩 만나는 거 같았는데, 그러면서 내게 여지를 주는 나쁜 남자였다.


다 같이 노래방에 가고 호프를 가곤 했다. 노래를 잘하던 영수가 멋져 보여서 관심이 갔다. 그는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옆자리에 와서 날 관찰하거나 괜히 장난을 치며 가곤 했다. 그런 마음은 내게 마음이 있을 거란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준은 목사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기 싫다고 했다. 그래서 재수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건데, 공부는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는 거 같았고 성과도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근데 사람이 선하고 잘생겨서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애였다.


엽이는 누나가 2명인 막내아들이었는데, 얼굴이 반반한데 공부는 안 하는 애였다. 근데 얘도 착하고 순박한 면이 있었다. 그는 내가 공부에 열중하고 있으면 머리카락을 몰래 만지다가 놀라기도 하고, 네이트온으로 내게 말 걸다 내 아버지에게 걸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메신저 하나 하는 거 가지고 그렇게 열불낼 일이겠냐만, 아버지는 공부하러 보낸 학원에서 연애를 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고, 나는 나대로 '그렇게까지 할 일이냐' 반발심이 강했다. 엽이가 내게 고백 비슷한 걸 하고 친구도 소개해 주었지만, 나는 목전의 수능 때문에 그런 약속 같은 건 희미해졌다.




우리는 같이 한강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낭만을 즐겼다. 물론 학업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지만, 우리에겐 수많은 좋은 날이 펼쳐져 있었고, 교실에만 박혀있기엔 그 순간들은 너무 찬란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아이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그 아이들은 서로를 보며 감탄했다.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고, 그 호기심을 받는 입장에서도 그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럴 때쯤, 10월이 되어갔고 점점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내게 영수는 본인에게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지만, 내가 그에게 관심이 있는 걸 알면서도 확신을 주지 않고 간만 보는 걔에 지치기도 했고 시험준비도 막바지에 다다라서 그렇게 한때의 감정놀음으로 끝맺게 되었다. 그렇게 수능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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