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팀에서 맡은 업무는 명절 전에 발간을 해야 하는 카탈로그 작업이었다. 남들 다 쉬는 연말과 연초에 검수 작업이 필수였다. 다른 동기들이 긴 연휴를 떠나는 동안 빨간 날에도 나가서 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미스는 계속해서 발견되었지만, 상사는 내게 지시만 내리며 그렇다고 같이 봐주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을 들들 볶았다. 분리를 요청했어야 하지만, 그땐 분리요청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던 초년생이었다. 브랜드 선정 작업도 전문가가 서류평가를 하지만, 정량 부분은 내가 다 미리 체크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 전문가들이 하는 것들은 결국 '본인 지식 뽐내기'와 '빨리 집에 가기' 뿐이었다. 간혹 그렇지 않은 사람이 드물게 있었지만, 나는 모든 업무를 누구 하나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부딪히며 배웠다. 그게 지금의 날 강하게 만들었지만, 그때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업무에 펑크가 나면 그건 다 내 잘못이었고, 그런 실수 때문에 위축되어 가는 날이 많아졌다. 동료들도 상사의 가스라이팅에 내게 협조해주지 않고 오로지 내 몫이었다. 너무 힘들었던 나날이었다.
한 번은 회식을 하고 집에 12시가 넘어서 들어가는데, 마침 연인이 얼굴 잠깐 보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끝나는 시간도 자꾸 지체되어 자정이 다 되어 들어갔고, 우린 차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학벌에 대해 상처받은 상사는 전화로 개 쌍욕을 배설하기 시작했다. '씨 X 좆같은 게, 네가 뭐라고 어디서 거지 같은 게' 입에 담을 수도 없게 험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그 무단폭격에 나는 그대로 얻어맞을 뿐이었다. 스피커폰으로 듣고 있던 연인이 '바꿔봐'라고 했지만,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나는 그 언어들이 '내가 말실수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화가 끊어지자 연인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 거야?'라고 반문했다. 나도 잘못된 걸 인지하고 있지만, 그땐 녹음을 해서 신고할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안은 채 잠을 설치다 다음날 출근해야 할 뿐이었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온전히 외딴섬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인사발령이 났고, 날 밀어내려 했는지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그 사람과 벗어나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또 다른 빌런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