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삼단계로 나눌 수 있다. 스트립댄서로 일하다 결혼/도망간 남편 찾기/이혼 후 아노라의 슬픔이다. 웬만해선 영화보다 핸드폰 안 보는데 너무 지루해서 피드만 계속 긁었다. 왜 그리 불쾌했을까 생각해 보니 여성을 상품화한 장소와 신데렐라 스토리 때문이었다. 너무 많이 가지고 태어나서 세상의 모든 게 하찮은 남자는 얼굴 보고 아노라 만나서 섹스하는 게 영화의 내용이다. 왜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다 가지고 태어나고, 아노라는 없이 태어났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몸을 갖고 태어난 건 운이 좋다고 봐야 하나. 날 때부터 가난하고 추남/녀로 태어난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아노라가 사는 기차소리가 들리는 집과 남자애가 사는 대궐 같은 집은 단번에 차이가 나고, 남자애는 그냥 심심하면 파티하고 심심하면 관계하다가 게임하고 약하러 여행한다. 무언갈 욕망해 본 적도 없고 성취한 것도 없는 어린앤데, 사람 병신 만들기도 참 쉽다 싶었다. (남자의 부모님이) 아이를 낳아서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다 해주면 이 꼴 나는 것이다. 내 친구 중에 '얘는 왜 일할 생각도 없고, 취업 걱정도 없어 보이고, 뭔가에 대한 갈망이 없지?'란 애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태어나보니 기업을 가진 아버지 밑에 외동아들이었고, 취업은 당연히 보장이 되어있었고, 그러므로 취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증도, 라이선스도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난 항상 바쁘고 조급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전전긍긍했고 꼭 가져야만 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너무 빨리 친해지려 해서 탈이 나곤 했고, 내가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건물을 사는걸 걘 신기하게 봤다. 언젠가 걔 회사가 있는 종로에 가는데, '땅 보러 오는 거야?'라고 걘 웃으며 말했고 그게 악의가 있는 게 아닌 줄 알고 있지만 난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너무 아까워서 틈만 나면 뭘 배우거나 걔 말마따나 부루마블을 하듯 땅 한 마지기씩이라도 사야 할 것 같은 강박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슬펐고 결국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씁쓸함을 가져다주었다. 남자애는 부모의 말을 거역 못하는 어린애에 불과했지만 결국 회사를 물려받고 그걸 탕진하든 어쩌든 사는 동안에는 평범한 사람이 누리지 못할 것을 다 누릴 것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재물로 마음을 살 것이고, 수틀리면 슈퍼카를 운전하면서.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 상상해 보지만 그런 사람은 이루고 싶은 것도 없을 텐데 그래서 남양유업의 황손녀 같은 일이 벌어지나 보다 생각할 따름이었다.
회사 직원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석사도 하고 자격증도 퇴근 후 사무관과 같이 스터디하고 레벨업 하고 있단 걸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열심히 살지 않는단 것도 아니다. 나 또한 회사에 매몰되는 게 싫어 퇴근하면 글을 쓰거나 종목분석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 그가 가는 길과 내가 가는 길이 다른 건 알면서도, 그가 가는 길은 예를 들어 석사, 자격증 같이 가시적이라면 내가 하는 건 수치적 수익, 재야의 저자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 간간히 드는 불안감은 지울 수 없다. 내가 하는 실패가, 정점에 오르지 못했기에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란 이치는 알고 있지만 가끔 드는 이런 감정은 몸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또 어디론가 떠나야 할까. 나는 점을 많이 찍기보단 큰점을 찍기로 했다.